칼빈의 주권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3)
1. 하나님 지식의 주체에 대한 비평
2) 하나님 지식의 ‘주체’에 대한 비평
지난 기고를 통해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의 우선순위를 확정하지 못한 채 인식론적 순환론에 머문 칼빈 신학의 태생적 한계를 살펴보았다. 올바른 신학 정립의 관건은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탐구하느냐는 ‘방법론’에 있지 않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아계심과 속성의 영광을 어떻게 주권적으로 계시하시며, 그 계시를 누가 깨닫게 하시냐는 ‘주체’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진리 인식의 절대적 주관자가 인간의 탐구심이나 지적 능력이 아닌, 언약대로 오신 ‘보혜사 성령’임을 확증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 인식의 과정에서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을 분리하며, 인간을 인식의 능동적 주체로 설정하는 논리적 구도를 취한다. 그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비추임 속에서 다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 지식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대전제로 삼고 그로부터 인간 지식을 필연적 결과로 도출하는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의 연역적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칼빈의 구체적인 주장을 다시 검토해 보자.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John Calvin, 『기독교 강요 上』,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1), 79]
여기서 칼빈은 올바른 신지식의 형성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실질적인 주체를 인간의 ‘응시’와 ‘검토’라는 의지적 행위에 두고 있다. 하나님을 응시해야만 파멸과 무능함의 존재인 인간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자신의 불의와 어리석음을 ‘확신’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창세기 3장 22절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의 기록처럼, 타락한 인간은 선악의 판단 기준을 자기중심적으로 세워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이러한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을 아무리 세밀히 살핀다고 할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불결함과 어리석음을 온전히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죄성과 무능을 깨닫게 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자발적인 성찰이나 응시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이자 그분이 베푸시는 무한한 은총의 지배 아래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엎드리는 것조차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라고 말씀하셨다. 미물인 참새의 생사조차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거늘, 인간이 진리를 마주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거대한 인식의 사건이 하나님의 절대적 허락과 주권적 통치 밖에서 인간의 자발적 ‘응시’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더 나아가 칼빈은 인간의 죄 인식과 하나님께 향하는 회개가 마치 인간이 주체가 되어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인 것처럼 묘사하는 낙관론적 견해를 내비친다. 그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자.
우리가 이 지상(地上)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쪽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전에 의(義)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최대의 불의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John Calvin, 『기독교 강요 上』,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1), 80]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 완전하다는 것”을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결코 ‘생각’하거나 그쪽으로 ‘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칼빈 신론의 치명적인 미흡함은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을 수평적 관계에 놓았다는 점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지식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신학적 고려가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그는 인식의 주체를 중생한 이성이라고 말하지만, 그 중생한 이성의 실제적 주관자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강조하지 않는다. 비록 칼빈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다음으로 후자를 논의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기독교 강요, 80]라고 주장하며 질서를 잡으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근본 조건은 하나님을 ‘인식의 주관자’로 확정하는 것이다. 이를 확정하지 못하면 결국 신학과 신앙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다는 인본주의적 과오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성립의 요건은 오직 성경에 계시된 총체적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성경 계시에 의존한다는 것은 하나님 지식의 확증이 인간의 사색과 경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다. 전인격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서 신지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창세전 은총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창세전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나 조건에 매이지 않는 무조건적이며 절대주권적인 사건이다. 성경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증거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은 인식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눅 8:1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에 속한 영역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오직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지혜, 곧 성령 하나님이 주관하실 때만 가능하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는 말씀은 인식과 믿음의 주체가 성령임을 확증한다.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전적으로 신적 감동으로 기록된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실현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는 증거와 같이, 성경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계시의 도구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의 관계는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먼저 알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이 두 지식의 관계는 보혜사 성령의 ‘주관자 되심’에서 출발해야 하며, 오직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깨닫게 될 때만 인간 존재의 본질을 바로 알 수 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절대주권을 온전히 세우는 마땅한 결론이자 신학의 출발점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