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3-03-21 20: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스승의 가르침의 마음과 자세


子曰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자왈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


『논어』 「술이」의 계속이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수(고기 포) 한 속 이상을 가지고 와서 (배움을 위한) 만남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가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

‘수’는 ‘포(脯 - 얇게 저미어서 양념을 하여 말린 고기)’다. 10개의 정(脡, 말린 포)을 속(束)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서로 만날 적에 반드시 폐백을 드려서 만나는 것을 예의로 삼았다. 성인들은 사람들이 선에 들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찾아와서 배우기를 구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가서 가르쳐 주는 예는 없었다(但不知來學 而無往敎之禮, 단부지래학 이무왕교지예). ‘회(誨)’는 가르쳐서 인도해준다는 뜻이다. 공자는 누구든 사람으로서의 예를 갖추어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자 찾아온 자를 가르쳐주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고래에는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거나 관계를 맺을 때 ‘집지(執贄, 폐백을 가지고 가는 것)’라는 예를 행했다. 지금 공자가 말하고 있는 예는 오직 스승과 제자로서의 첫 만남을 할 때 사람이라면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였다. 고기 포는 그 당시 그다지 비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포 한 속 그러니까 고기젖을 말려서 만든 육포 10장 정도만 가져오면 공자는 그 사람을 제자로 거두어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포 속은 오늘날로 말하면 스승과 제자로서의 만남의 예의 표시였다.
공자는 제자의 도리를 갖추는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사람으로서의 근본적인 인성의 여부를 배움의 발판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공자를 스승으로 여겨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을 공자는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최고 수준 중에 속하는 스승이었다. 그의 제자가 3천 명에 이른다는 풍설에서 보면 공자라는 인물이 어떠하며 그의 문하생이 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진한 스승이었다. 속설에 의하면 제자 자로는 오늘날로 말하면 건달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아끼던 제자 안연은 집안이 너무도 가난했다. 후에 이 두 사람은 공자 제자의 십철(十哲)에 드는 인물들이 되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정황으로 보면 입학금이나 등록금을 제대로 내지 못했을 듯싶다. 그런데도 공자는 그렇게 자신의 가르침의 사명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스승이었다.

공자의 스승관은 현재의 교육실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늘날은 돈이 없으면 어떤 공부도 하기 어렵다. 공부의 조건, 좀 고상하게 말하면 학문을 위한 조건에 금권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다음이 개인의 관심과 열정, 흥미와 인내 등등이 되고 말았다. 학생과 스승의 관계는 관료적 내지 기계적 관계로 맺어진다. 담임과 학년 등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맺어짐이 대부분이다. 이 관계는 스승과 학생 각각의 이익이 맞아 돌아가야 그럭저럭 지속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학원 등과 같은 교육현장에서는 참담하게도 서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실력을 갖추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더 나은 이익을 위해 스승과 학생이 서로를 찾는다. 혹시 현재보다 더 나은 이익이 생길 수 있기만 하다면 스승과 학생은 각각 그 이익을 찾아 서슴없이 갈라선다. 교육계가 자연세계의 먹이사슬처럼 그렇게 이익을 중심으로 연결되고 만 것이다.

공자의 스승상과 오늘날의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하나는 공자에게서는 스승이 학생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스승을 찾는 것을 제자의 조건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우리의 스승이 되시려 우리를 먼저 찾으셨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학생은 어린양처럼 어리석어서 혼자의 힘으로 스승을 찾을 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찾으신 것은 우리를 그렇게 어린양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학생과 스승이 서로의 이익을 더 많이 얻고자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에서의 배움이란 대부분 허겁지겁, 혼란, 성급함, 조급함, 경쟁심, 불만족, 사리사욕, 욕망의 사로잡힘 등등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스승이 되실 때 우리는 더 이상 분주할 이유가 없다. 그분 이외의 누구에게서도 어떤 무엇에서도 우리는 더 나은 이익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그분 안에서 안식과 평안의 배움, 자유롭고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배움이 있으며 그에 따른 열매들이 맺힌다.

안정되고 평안하고 선한 열매를 한없이 맺게 하시는 분, 그분은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먼저 찾으셔서 제자로 삼아주셨다. 그가 열두 사도를 부르신 것이 그 증거다.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6)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 이외에 참 스승은 없다. 그러니 그분을 스승으로 삼아 그분에게서 배우고 그분을 예배하자. 그분을 세상에 널리 전하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쉰. 5-6세기 동로마 제국 교회의 비성경적 정통성
그리스 비극 정신을 논리적 추론으로 압살한 소크라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