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신학과 학문이 같은 수준이어야 겸손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교회의 기능을 “신학, 학문(Theologie, Wissenschaft)”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인문학적 신학이다. 우리는 최근에 일어난 인문학적 신학이 적절하지 않음을 제언한다. 그것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않는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자연신학 논쟁은 잘 알려졌다. 1934년 브루너가 <자연과 은총>(Natur und Gnade)을 밝히자, 바르트의 그에 대한 응답 <아니오!>(Nein!)를 발간했다. 두 신학자의 논쟁은 잘 이해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브루너는 자연신학은 인정하고 바르트는 특별계시를 인정했다는 식의 이해이다. 필자는 박사논문에서 이 부분을 다룰 때에, 칼 바르트의 계시 이해가 부당함을 제시했다. 에밀 브루너와 칼 바르트는 모두 현대신학자로서 그들의 계시 이해를 동의할 수 없다. 브루너는 자연에서 접촉점을 인정했지만, 바르트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르트의 계시 이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계시가 발생하는 구도, 자연(러시아 관현악단, 죽은 개)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구도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는 개혁신학에서 갖고 있는 특별계시 개념이 전혀 아니다. 바르트에게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구분 자체가 없다. 성경이나 설교에서도 의미가 없으면 의미가 없고, 죽은 개에서도 계시가 발생할 수 있다. 계시를 신의 자유와 사랑으로 배치시키는 것이 특징인데, 개혁신학은 말씀과 함께(cum verbo) 성령의 조명으로 들려지게 된다(계 2-3장). 즉 바르트가 신학을 일반, 철학과 연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적 신학으로 그의 계시 이해의 전제를 파악할 수 있다.
바르트는 신학에 어떤 우월성을 두는 것을 거부하는데, 그것을 과대평가(Uberschatzung)를 거부하고 ‘겸손(Demut)’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원리는 “세계에 대한 절망에서 기독교적 희망으로”라는 문구이다. 바르트는 신학이 절대성을 갖는 것을 명백하게 거부한다(GG., 30). 그리고 기독교적 철학(philosophia christiana)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GG., 31). 바르트는 그러한 겸손한 자세가 철학, 역사과학, 심리학에서 신학이 봉사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바르트는 신학과 제 학문의 학제 간 융합을 해야 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예배에서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신학에 특수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GG., 31). 그 특수한 조건의 신학은 예배에서 하나님에 관한 말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기능이다. 바르트가 제시한 작은 글 구문에서(GG., 31), 박순경은 ‘consonum reiiciatur’를 ‘합일’로 번역했는데 좋은 번역이 아니다. ‘조화’로 번역해야 한다. 튜레틴(Francis Turretini, 1623-1687)과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신학과 다른 학문의 조화를 피력하지만, 튜레틴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엄격하게 나눈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튜레틴과 아퀴나스를 함께 묶어서 신학과 학문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왜곡했다. 튜레틴은 신학의 배타성과 우월성을 견지하고 있는데, 바르트는 신학이 갖는 배타성을 부정한다. 그런데 튜레틴을 인용하면서 아퀴나스를 첨부시켜, 어거스틴과 묶어서 자기 동조 세력으로 유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1929-2021)은 인문학을 학제 간 통섭(Consilience)이라고 했다.
바르트는 신학을 학문의 한 분과로 분류했다. 그런데 바르트 이후에 유럽에서는 개신교 학부는 거의 사라졌고, 종교학부로 재편되었다. 그것의 시작은 바르트에서부터 시작된 학문 체계 훈련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 체계로 1948년에 WCC가 네덜란드에서 창립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1962-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을 인정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칼 라너(Karl Rahner)가 제창한 것으로 말하지만, 칼 바르트가 신학과 일반 학문의 수준을 같게 함으로, 일반 영역에서 신학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바르트는 신학을 학문의 한 영역으로 분류한다(GG., 32). 바르트는 게르하르트가 학문과 신학을 구분하는 것을 밝히면서, 그의 의견을 거부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신학이 인식론을 체계화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으로 보인다. 후기 개혁파는 진리를 객관적 사실로 규정하며, 지식(notitia)을 동의하고 신뢰하는 구도로 했다. 즉 신학과 신앙을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는 훈련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바르트는 그러한 구도 위에서 인식론으로 가능한 신학은 일반학문의 인식론과 차이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훈련에서 인식훈련이 필요하다. 즉 신학훈련에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인식론, 인문학적 소양이 신학에 들어올 때는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바르트가 말하는 겸손은 모든 학문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이고, 이웃 앞에서 겸손이다. 학제 간 통섭에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겸손이다. 학제 간 통섭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하다는 평가는 부당하다. 특히 AI 시대가 되어서는 더욱 그렇게 된다. 학제 간 통섭의 최고권위자는 AI(AGI)가 될 것이다. 통섭은 두 영역이 융화되는 매우 특수한 기능인데, 신학과 일반학문의 융화는 매우 신중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신학은 영적 분야이고 일반학문은 육적 분야이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는 학문과 신앙의 권위의 차이점을 제시했다(인간 내면의 본유적 원리와 신적 계시). 그리고 신학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며, 과학적 방법으로 소유될 수 없다. 학문의 시작은 인식론이지만, 신학에서 지식은 시작이 아니라 목표라고 했다(GG., 32). 바르트는 게르하르트의 제시와 다르게 신학이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서 인식론을 인간의 노력으로, 인식의 길을 걷는 것, 신학은 그 길에 대한 해명으로 제시했다(GG., 32-33). 바르트는 신앙고백(Bekenntnis 또는 Konfession)에서 Weg Rechenschaftr(해명의 길)로 전환시켰다. treading this path(CD., 8, 이 길을 걷기)로 번역했다.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공리(公理, axioms)’로 신학을 구성한다.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 1895-1987)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를 제언했다. 인식론적 대결에서 신학은 일반 학문을 이길 수 없다. 신학은 증명과 이해를 목표하지 않고, 학문은 증명과 이해 위에서 논리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공리’나 ‘전제’에 의한 것이 아닌, 믿음과 계시에 의해서 수행한다. 반틸 박사가 제시한 전제주의는 합리적 인식을 위한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성경무오성 등의 전제를 의미한다. 반틸 박사의 전제주의는 진리 변증을 위한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다. 메이천 박사(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의 뒤를 이은 반틸 박사는 가장 대표적으로 칼 바르트의 사상에 맞섰다. 칼 바르트의 사상을 명확하게 거부하는 진영은 한국 사역자들이다. 메이천의 제자인 박형룡, 그의 제자인 박윤선과 반틸 박사에게 배운 서철원이 있다. 최근 문병호도 칼 바르트에 대한 신학 비평의 대작을 출간했다. 그러나 비판한 분야는 각각 상이하다. 그것은 자기 공리에 의해서 신학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명료한 교리에 근거해서 수행해야 한다. 바르트는 그 교리를 부정하고 자기 공리에 의해서 재형성했다. 공리로 신학하는 것은 일반학문과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신학은 공리가 아닌 계시, 모형계시에 의해서 수행하는 배타성이 있는 특별한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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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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