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1-06-01 16:3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진리를 위해 죽겠다는 사람들의 모임, 말씀운동


비진리와 싸워야 한다며 목사님들이 핏대를 높이면, 성도들은 멀뚱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다. 당위성은 갖고 있지만 절박함엔 공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내게 닥친, 내가 할 일이 아니라 목사님들이 알아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설령 나의 일이라 여긴다 해도 ‘언젠가 할, 먼 훗날의’ 것으로 여기며 방관한다. 느긋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린다. 다른 일에는 집착에 가까운 열심을 내면서 유독 이 일에서만은 여유만만이다. 왜? 하나님이 하시니까.

 이 세계의 본질과 시종, 존재의 목적을 모두 관통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의 논리’를 유일하게 갖고 있으면서 정작 취하는 태도는 매우 안이하다. 원인은 두 가지다. 이 진리가 진짜가 아니거나,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거나.

 구원파 집회에 가게 되었다. 해외 봉사활동을 무료로 보내준다는 말에 혹해서 지원했고, 그들이 뭐라던 나만 심지 굳게 버틴다면 상관없겠지 싶었다. 세 번의 워크샵과 최종 면접을 통과해야 자격이 부여되는데 일단 그 중 처음으로 열린 워크샵에 참여했다. 대절된 버스를 타고 거의 두 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고급스런 건물은 3천 명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인원의 숙식과 모임장소를 제공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정은 총 2박 3일이었고, 3일째 되는 날은 주일이어서 그 전날 빠져나올 요량이었다.

 첫째 날 대강당에 모여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교단 소속의 합창단과 댄스팀,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연주와 더불어 해외 봉사활동을 다녀온 앞 기수들의 소개와 영상으로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채웠다. ‘마인드 강연’이라고 이름 붙여진 시간은 그 교단의 대표 목사가 나와서 설교하는 시간으로, 해외로 봉사를 나갈 지원자들에게 ‘마음’을 열고 상대를 대하라는 둥의 건전한 내용을 전했다. 다만 윤리 도덕적인 면해선 너무 빤했고 신학적인 면에선 지나치게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어 따분할 따름이었다.

 둘째 날도 비슷한 패턴으로 일정이 진행되었다. 처음 한 두 시간 정도는 버틸 만 했지만 점차 시간이 갈수록 괴로워졌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은 표정의 단원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도 슬슬 거부감이 느껴졌고, 건질 거리라곤 없는 밍밍한 강연엔 -대부분의 지원자가 숙면을 취했는데- 슬프게도 나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지쳐있었으며, 딱딱한 의자에 종일 앉아있자니 그렇잖아도 성치 못한 무릎과 허리가 배겨나질 못했다. 더 이상 이러고 있는 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담임샘에게 언질을 넣었다. 그녀는, 한의사인 장로님이 오고 계시니 좀 더 기다렸다가 진찰을 받고 가라고 했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양호실에 링거를 맞고 누웠다. 나의 담임선생, 양호선생, 장로, 목사, 직분을 알 수 없는(?) 남자분이 그 곳에 함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구원 특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담임샘은 성경책과 종이와 펜을 가져와 자신들의 교리를 열심히 설명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우리의 죄 용서를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만약 그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지능이나 나이나 믿음이 안 되면 어떡하냐고 묻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강경하게 대답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하며 성경을 펼쳐 구석구석 ‘구원’과 관련된 구절들을 내 눈앞에 디밀었다. 열성적으로 설명을 하던 담임샘이 말미에, ‘그럼 넌 의인이냐 죄인이냐’라고 물었다. 논리의 흐름상 ‘의인이다’라고 대답하는 게 맞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꺼림직하기도 했고 그들의 얘기를 더 듣고 싶기도 해,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리고 곧장 심화반(?)의 장로에게로 넘겨졌다. 그분 역시도 똑같은 말씀을 했다. 내가 천만 원의 빚을 졌는데 아버지가 갚아주셨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되지 그 빚을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예를 들었다. 철저한 구속사 논리에 입각해, ‘나의 죄 사함의 공로는 오로지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 자신이며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판가름 난다고 했다.

 문득, 멍청한 일반 개신교도들보다 훨씬 영리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부분적, 파편적으로 ‘구원’에만 집중시켜 성경을 해석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의 논리를 갖고 있다. ‘우리의 모든 죄(미래에 지을 것까지)는 이미 그리스도가 용서해주셨으니, 우리는 따로 할 것이 없다.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금통을 돌리지 않고,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 추근대지도 않고, 기도나 회개에 연연하지도 않고, 그저 기쁘게 누리며 진심어린 봉사와 찬양을 하는 것이다.

 물론 핵심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매의 눈(!)으로 여기저기를 뜯어보면서 알아낸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의도적인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이 그 안에서 교사, 방송국, 공연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었다. 정부의 인증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교단의 대안고등학교도 지역별로 열 몇 개가 있었고, 그 곳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들끼리 했으며 그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도 결국 돌아와 이쪽 일-해외봉사, 문화공연, 전도-등을 했다. 매우 위험천만한 것은, 그들은 복음(이 ‘복음’이란 것도, 오직 자신들이 말하는 그 교리만을 뜻한다)과 직접적으로 관련한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이 가장 가치롭고 의미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을 떠나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사는 것이다.

 비진리와의 싸움은, 세속에서 부딪쳐오는 것들과 정면으로 맞설 때 더 의미가 있다. 검증되지도 않은 ‘복음’을 감히 진리라 여기며 끼리끼리 뭉쳐 사는 것은 교활하게 ‘하나님의 일’을 명분으로 하는 도피나 다름없다. 막말로, 성도들끼리 집단생활을 하며 매일을 노래와 춤, 성경말씀으로 보낸다면 누구 하나 얼굴 찌푸리며 살 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반쪽짜리 신앙이고, 위험천만한 믿음이며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태도였다. 고작 구원 받은 것 하나 가지고 온 세상의 보물을 다 가진 것 마냥 행복이 충만한 얼굴의 그들은,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를 하고, 선교를 하며 사명에 몸 바쳐 살았다. 나는 그 따위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머리만 무거워 꼼짝 않고, ‘하나님이 하시겠지’라며 넋 놓고 있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기가 막히고, 부끄러웠다.

 삼천 명 가량이 운집한 대강당에 앉아있는데, 별안간 목울대가 뜨거워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들 중에서 진리를 알고 있는 건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삼천 명 가운데, 나였다. 나보다 더 잘나고 더 올곧고 더 건강하고, 더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 주위에 널렸는데 그런 것에 상관없이 그냥 나를, 일방적으로 찍어주셨다. 유일한 진리를 깨닫게 하셨고 그 진리를 지키고 전파하는데 나를 쓰겠다 하셨다. 내가 아니어도 괜찮으셨을 텐데 굳이 나를 택하신 거였다. 사무친 감사함에 눈물이 멈출 생각을 않았다.
 
 나이도 어리고 아직 배움의 초입에 있는 학생이라 감히 누군가를 계도할 생각은 없지만, 말씀운동 안의 성도들은 정말 뼈저리게 감사해야 한다. 아니, 감사는 이제 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싸워야 한다.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 이유는, 결코 우리 일신에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목사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교회 사람들이 다 제각기 알아서 할 일 하고, 누군가에게 강요 같은 거 안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이고 하는 모습들 보니까 여기 참 만만하고 편한 곳이구나 싶죠? 절대 편한 곳 아닙니다. 여기는 진리를 위해 죽자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에요.’

 바로 그거다. 우리는 진리에 미쳤고, 진리가 삶의 목표이며, 진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삼천 명, 아니 60억의 사람들 중에 하필 이 말씀운동에 진리를 주신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진정 의미 있는 일에 매진하다 죽으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누리며 감사해 하고 좋아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이제는 든다. 사명을 갖고 전파하고 싸우기에 우리의 생은 너무나 짧다. 비진리의 세력들이 감히 진리 운운하고 성도를 기만하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더 이상 태평하게 지켜봐서는 안 되며, 보석과도 같은 진리의 당인 교회가 세워지고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 더 이상 남 일인 양 팔짱 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목사님들이 아닌,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진아 (장안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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