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칼빈과 그 시대
금년의 세계 화두는 하나같이 “위기는 곧 기회이다”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 말은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16세기는 위기의 시대였고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고 또한 어두움의 시대였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교회의 영적 어두움은 새로운 시대를 맞기 위한 예고편과 같았다. 그런데 그 종교개혁이 정치,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물론 종교개혁은 15세기부터 일어난 문예부흥과는 방향과 목적이 다르지만 문예부흥이 종교개혁의 자극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문예부흥은 헬레니즘이 지배했고 종교개혁은 헤브라이즘 즉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문예부흥 즉 르네상스 운동은 한마디로 인간해방운동이라고 할수 있는데 당시 중세기 사람들은 교황의 신권독재 제도(神權獨裁制度)의 희생물로서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르네상스 운동은 인간의 삶의 모든 분야의 해방이 교회 개혁에 새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온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학문과 기술, 교통의 발달이 종교개혁을 앞당겼다
르네상스의 결과는 새로운 발명에 대한 자극이 일어났고, 북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어 대서양의 모습이 들어났다. 그러니 교통이 발전되어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고 상업이 발전되고, 천문학이 발전되고 다양한 항해기술이 발명되는가 하면 망원경의 발명, 화약의 발견이 이루어졌다. 더구나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 그리고 종이류의 발달은 가히 놀랄만 했다. 인쇄술의 발달로 고전이 출판되고 학문이 부흥되고 과학과 철학 그리고 교육에 엄청난 발전을 보았다. 중세의 수도원이 대학으로 탈바꿈하면서 종교 개혁의 준비가 착착 이루어졌다. 더구나 예술과 문학이 발전되었다. 그래서 걸출하고 뜻있는 학자들이 자기 나라말로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사실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 개혁의 횃불을 지피기전, 한 세기 전에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 있었다. 즉 그들은 존 위클립, 윌리암 틴데일, 얀 후스 등이다. 만약 이들이 없었더라면 루터도 없었을 것이고, 칼빈도 없었을 것이다. 15세기의 종교 개혁 선구자들은 아직도 교회와 사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못했음으로 교회적으로 성공은 못했지만 후일 마틴 루터나 칼빈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순교의 피가 16세기의 종교개혁의 꽃을 피웠다.
종교개혁 전의 개혁자 존 위클리프는 성경 번역가
우선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0-1380) 옥스퍼드 출신의 대학자이면서 그는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궁중에서나 일반 대중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큰 감화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사제들에게는 외면 당하고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위클리프는 성직자들의 타락과 죄를 신랄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최초로 영어 성경을 번역하였으나 당황한 로마 당국이 그 성경을 모두 회수해서 불태웠고, 그것 때문에 미움을 받아 살아 생전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두려워 손을 못대다가 당국은 사후에 수십년이 지난 후에 그의 시신을 파내어 화장하고 뼈를 갈아 템즈강에 띄우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교황권과 화체설을 공격하고,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최고 권위임을 설교했다. 위크다프의 메시지는 항상 평범한 성경 해석에다 복음적 교리를 강하게 외쳤다.
또한 윌리암 틴데일 (W. Tyndale, 1490-1536)은 흔히 영역 성경의 아버지라 불리우리 만큼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성경을 번역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천 설교자로서 또는 다작가로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선포하고, 성경만이 최고 우위임을 주장하면서 교황을 비판했다. 그러나 로마 당국은 그를 붙잡아 부르셀에서 화형을 시켰고 그래서 틴데일은 순수한 복음과 교회 개혁을 외치다가 순교의 잔을 마셨다.
후스의 순교 때문에 루터가 나왔다
그리고 얀 후스(Jan Huss, 1373-1415) 의 삶과 순교는 종교 개혁 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후스는 프라하 대학의 총장으로서 베들레헴교회의 담임 설교자였다. 그는 개혁주의 설교자로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는 언제나교황청과 교회의 부패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신앙의 유일한 기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며,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힘있게 외쳤다. 그래서 1410년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1415년에 장작 더미에 활활 타는 불꽃 속에서 장렬히 순교했다. 그는 살이 타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울며 지켜보는 성도들에게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진리를 지키라”는 명언을 남겼다. 루터가 종교개혁 하기 전 꼭 100년 전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나는 후스에게 빚진 것이 많다”고 했다. 후스가 없었다면 루터도없었을것이다.
칼빈의 선배이자 종교개혁의 실제적 동력을 불어넣은 마틴 루터 (Martin Luther)를 생각해 보자. 사실 그 당시는 시대적 분위기가 루터같은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던 시기였다. 어찌보면 종교 개혁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크고 놀랍게 확대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일찍이 라틴 불가타 성경을 읽 다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 진리를 확신한다. 그 후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복음적인 운동을 새롭게 시작할 생각으로 95개조를 뷔텐베르크 정문에 부착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때 루터는 자신을 죽이려는 보름스(Worms)회의에 오히려 당당히 맞서서 파문장을 찢음으로 이제 종교개혁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하나님은 루터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루터는 뜨거운 설교, 우렁찬 바리톤적 찬양, 활기찬 삶이었으나 그의 관심은 독일에 국한한데다 완전한 개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에는 힘이 부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30년 후 요한칼빈이란 한 천재를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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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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