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3-04-11 22: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평화의 사람 칼빈_49


아마도 독자들은 칼빈에게 평화라는 말이 어울릴까 하고 의심하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칼빈은 일생동안 전투적인 삶을 살아왔다. 항상 칼빈은 반대하는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늘 쫓겨 다녔다. 그리고 그는 늘 로마 가톨릭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이단들과 논쟁을 벌였다. 특히 칼빈의 삶 가운데 결정적 오점이라고 말하는 이른바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데 동의했기에 칼빈을 말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악평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의 반대자들은 칼빈을 무자비한 자, 독재자, 냉혈동물 심지어 살인자란 말로 저주를 퍼부었다.


선입관과 거짓된 문헌을 제외하면 그는 평화의 사람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독자들을 위해서 칼빈 목사에 대한 몇 가지 변명을 하고 싶다. 우선 칼빈의 외모를 보면 유난히 깡마른 것은 사실이지만 아주 무섭고 날카롭게 비호감적으로 그린 것은 당시 제네바에서 칼빈의 반대파들이 그린 그림이다. 특히 눈에 흰자위가 유난히 많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낼 것 같은 전투적인 자세의 초상이 많다. 왜냐하면 칼빈의 제네바는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숱한 반대자들과 적들이 칼빈을 핍박하고 괴롭히던 때에 그의 모습은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나라에서 그린 칼빈의 초상은 평화와 자비 그리고 영감에 넘치는 초상들이다. 예술에도 중립은 없다. 그림 그리는 화가도 사진작가도 모두가 자기가 갖고 있는 세계관, 인생관이 나오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당시 칼빈의 모습을 보면 강인한 인상, 독재자적인 인상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그때 개혁교회와 로마 가톨릭 사이에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인지라 서로 물고 늘어지고 서로 배신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이 믿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넘어간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이 더 극렬히 칼빈을 비난했다. 그중에서도 볼섹이란 신부가 압권이었다. 그는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해서 칼빈 전기를 쓰고 이 지구상의 모든 험악한 욕설을 칼빈에게 부었다. 그 문건은 계속 뻥튀기가 되어 칼빈을 철저한 이기주의자, 독재자의 모습으로 그리려는 사람들의 일차 자료가 되었다. 독자들은 오늘날도 교회 또는 교단의 싸움을 할 때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 문건을 만들고 상대방을 헐뜯는 신문, 방송 그리고 이메일 등이 나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상대방을 매장시켜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상상하면서 16세기 제네바의 칼빈을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칼빈도 약점이 많고 성격적으로 그리 원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신경질도 있었고 독단적인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로 27년간을 목회하면서 사랑과 자애가 넘치고 섬세하게 양무리를 목회했던 사람이었다. 시편 찬송을 개발해서 대중들을 깨우고  어린이 교육, 청년 교육, 신학 교육을 철저히 하고, 교회와 교회 사이에 연합과 평화를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말씀과 성령으로 살려고 노력했고 병약한 몸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그를 배신한 사람도 많았고 도전 세력도 많았지만 그의 주변에는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많아 그를 도왔다. 그는 목사로서 철저히 강해설교를 통해서 잠자는 영혼을 깨웠을 뿐 아니라 그 바쁜 중에서도 환자 심방을 마다하지 않았던 전형적인 목사였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화형 집행을 막으려 했던 평화주의자였다

세르베투스 사건만을 봐도 그렇다. 칼빈은 그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그는 칼빈의 권고를 오히려 욕하면서 거부했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의사로서 평신도 신학자였다. 그가 ‘삼위일체’란 저술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부정했다. 독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시는 교회의 위반자는 바로 국법을 문란케 하는 대역죄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정치와 교회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칼빈은 시의회의 결정권을 가진 자가 아니고, 고문의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의 사형을 적극 막기 위해서 노력했다. 의회에 칼빈의 말이 먹혀들지 않자 제발 화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마저 먹혀들지 않자 칼빈은 동의하고 말았다. 칼빈은 모든 것을 사랑과 평화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 당시의 정치 체계로는 그것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후예들은 그것마저 가슴이 아파 지금부터 수백 년 전에 있었던 화형장에 세르베투스에 대한 참회의 비를 세웠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칼빈을 따르는 불란서 휴그노파 성도들 50만 명을 참수하여 세느강을 붉게 물들이고 화란에서는 1,500여 명을 죽이는 역사의 죄를 아직도 참회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칼빈은 휴머니즘의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 중심의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칼빈은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평화의 동맹은 저주를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한 투쟁은 복되도다.”(p.466)라고 했다. 참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 그것이 칼빈의 메시지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지도자의 힘 (고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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