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6-05-11 19:3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칼빈의 주권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5)


<지난 호에 이어서>

2. 자연계시에 대한 의존 비판

칼빈은 육의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자연은총을 지녔다고 한다. 즉 인간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전인격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으므로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먼저 칼빈의 자연은총(일반 은총)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자.

사실상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John Calvin, 『기독교강요 上』, 김종흠,신윤복,이종성,한철하 공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91), 89-90]

칼빈은 인간의 타고난 지각 본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유일신이며 창조주인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앞의 본문은 인간의 신인식 능력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성과 공의의 심판권을 약화시키고 있다. 칼빈의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도 개혁파 신학 전통에서 이어지는 자연은총론 혹은 자연신학론이다. 이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주장이기도 하며 칼빈과 개혁파 신학도 극복하지 못한 신학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주론적 논증에서 말하는 것처럼 제일 원인을 창조주로 추론하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종파에서 이성적 추론을 제일 원인자로서 막연한 신의 존재는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처음 지었을 때 타락하지 않은 영적 몸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사도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증거한다.(롬1:20) 하지만 그 타락하지 않은 몸도 창조주를 바로 알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창조주를 배반하고 창조주와 같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전인격의 영적 죽음으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에게 자연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의 몸으로 이 땅에 와서 태어날 때부터 육신의 몸을 벗을 때까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칼빈의 자연은총론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중세 로마 가톨릭의 스콜라 신학으로 이어진 인본주의 사상의 연속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칼빈의 주장을 조금 더 살펴보자.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불인정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 영혼의 최고 행복(summum animae bonum)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며, 그리고 이 영혼이 하나님의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고 플라톤(Platon)이 자주 가르친 것도 다만 그런 의미의 것이였다. (John Calvin,『기독교 강요 上』, 서울: 생명의말씀사1991, 89-90)

칼빈은 인간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 인식에 두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 삶은 허망하다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 지식을 붙잡을 때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화된다고 말하며, 이를 플라톤의 사상으로 보강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근본적 문제를 가진다. 첫째, 인간 존재 목적을 ‘인식’으로 환원하는 문제다. 성경은 인간 존재 목적을 단순히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 존재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 둔다. 이를 선지자 이사야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 43:7)고 예언하며, 또한 사도 바울은 “이는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고 증거한다. 즉 인간 존재 목적은 인간의 인식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 계시에 있다.
둘째, 하나님 지식 도달 가능성을 인간에게 전제하는 문제다. 칼빈의 문장은 인간이 하나님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성경은 타락한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육에 속한 사람은 (....)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하나님 지식은 인간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라”(요일 5:20)고 증거한다.
셋째, 철학 사상을 신학 근거로 사용하는 문제이다. 칼빈은 자신의 주장를 보강하기 위해 플라톤의 사상을 인용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지식의 근거를 철학에 두지 않는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철학은 타락한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따라서 철학적 최고선 개념은 계시된 하나님 인식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는 여호와 계시 중심 신학을 이성 중심 신학으로 이동시킬 위험이 크다.
넷째, 특별계시의 절대성에 대한 훼손 문제이다. 성경은 하나님 인식의 유일한 통로를 분명히 한다. 특별계시(성경)와 성령의 주권적 사역 이 두 가지 없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성립할 수 없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중생이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다. 따라서 자연계시나 인간 내면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 인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특별계시의 절대성을 상대화하는 오류이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계시와 성령의 사역을 중심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영적으로 죽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자연인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저주가 덮인 만물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며 또한 영생의 말씀인 특별계시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박용기, 『성경적 기독교』 성남: 진리의말씀사2010, 50-51)
신지식에 이르는 과정은 성령을 통해 특별계시의 기록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영적으로 자라면서 일반계시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세상의 일반계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양할 수 있게 된다. 택자들에게만 은혜로 주시는 특별계시의 말씀이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산을 옮기고 마치 창조주처럼 행세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경외하는 것과는 별개의 사안이다(마17:20; 고전13:2).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칼빈은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이후 개혁파 신학의 신관이 선명하지 않은 원인이 된다. 하나님 절대주권과 인간 자유의지의 관계, 특별계시(특별은총)와 자연계시(자연은총)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선명하지 못한 논의는 성경을 통해 분명히 극복해야 할 신학적 과제로 아직 남아 있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한경진 목사 (산수서광교회 / 광주 성경신학학술)

칼빈의 주권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