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5-11-16 22:4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하스모니아 왕조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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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현안에 부담을 안은 지도층이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발언을 내자 모 종교인은 걸핏하면 들먹이는 역사가 무슨 전당포냐며 날을 세운 독설로 맞받았다. 사건의 비중에 비례해 평론은 치열해지기 마련이며, 근현대기의 핵심 쟁점인 친일 논쟁은 그 좋은 예이다.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6천 이상을 사형으로, 4만 여를 징역으로 처벌하며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언정 민족 반역자는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 호언했으나,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좌절되고 좌우의 갈등이 난마처럼 얽혔던 우리는 6·25 당시 독립군(조선 의용군) 출신들이 남침의 선봉으로 내려오고 친일 논란의 인물들이 조국을 지키고자 피를 흘렸던, ‘대략 난감’의 힘겨운 역사를 견뎌야만 했다.
 하스모니아 가문의 제사장 마티디아스와 다섯 아들, 그리고 전통파 ‘경건한 자들’ 하시딤이 합세했던 주전 164년의 성전 정화는 수전절(修殿節)의 기원이 되었으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지녔던 지휘관 셋째 유다 마카베오(166~ 160 B.C.)는 헬라파에 의해 장악된 예루살렘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결탁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한때 기고만장했으나, 요단강 동편으로 피신했던 막내 요나단(160~142)은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셀레우코스 내 왕위쟁탈전을 이용해 여러 특권을 획득했고 152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이즈음 셀레우코스 왕에게 협조한 대가로 사독 가문 출신이 아님에도 대제사장직을 허락받은 그의 행보 이후 왕조의 성격 규정과 관련한 상당한 반발과 논란이 초래되었다.
 로마와의 우호를 도모했던 형 유다처럼 로마의 동맹자로 인정받고자,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노력하며 확장을 꾀하던 요나단은 셀레우코스의 트리폰에 의해 제거당했지만, 군세를 추스른 마지막 생존자 둘째 시몬(142~134)은 기존의 대사제직에 더해 자신이 지지했던 데메트리우스 2세로부터 영구한 총독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된 동맹국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백성은 그를 ‘유대인의 총독이자 지도자인 대사제’로 높이기 시작했고, (마타디아스의 조상 이름에서 유래한) 하스모니아 왕조의 실질적 개창자 시몬의 통치 아래 마카베오파, 헬라파, 하시딤파의 화합이 이루어진다. 가장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던 로마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유지한 하스모니아를 쓸만한 동맹자로 간주했고 실로 수 세기 만에 평화의 시대가 펼쳐지는 듯했다.
대체로 안정이 유지되면서 시몬은 인기를 누렸고 하스모니아 가문이 대제사장 및 왕직을 세습할만한 정통성을 가졌는가의 시비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권좌를 노린 사위가 초청한 연회에서 그는 암살당했고 부인과 두 아들도 처참히 살해된다. 미리 군권을 넘겨받았던 셋째 요한 히르카누스(134~104)는 살아남아 사태를 수습하고 초반의 위기를 극복한 뒤 카리스마 넘치는 정복을 감행한다. 예루살렘 함락 직전 개입해 도움을 준 로마와의 조약을 갱신했고,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약화를 틈타 주변 영역을 착실히 잠식해갔다. 동편 트랜스요르단을 통제하고 서쪽 해안까지 진출했으며, 북으로 사마리아를 파괴하고 갈릴리 일대를 장악했지만, 남쪽 에돔인을 정벌하며 유대교 개종을 강제한 처사는 비난과 혼란을 불러오게 된다.
임종 시 스스로 사두개인이라 밝혔던 히르카누스의 때에 헬라파는 사두개인으로, 하시딤은 바리새인으로 분파된다. 독립 시대에 유대인의 일부는 메시아 강림에 대한 소망을 품었으나, 왕조의 모습은 점점 헬레니즘화의 길로 흘러갔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타나크(유대교 성경)의 핵심인 토라를 기술한 모세와 같은 레위 계통이었기에, 유대교는 레위 지파를 왕직이 포함된 특별한 의미로 간주한다. 왕의 홀이 언약된(창 49:10)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 레위 지파의 왕에 만족하던 인본적 가치관의 한계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 명시하심을 누차 배우고도 여전히 이 땅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별하려 드는 사망의 나로 이어진다. 예수의 피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육적 절망으로 몰아가시는 영적 축복의 기쁨을 칼빈은 다음처럼 자신의 유언에 담았다. ‘저와 같이 이렇게 비참한 죄인에게도 자비의 아버지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이 제게는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자유기고가

하스모니아 왕조의 성쇠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