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0-01-28 10:5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아마존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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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할 권리, 파괴할 권리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청정한 자연이 있다. 황토와 볏짚으로 집을 대신하고, 그 날의 식사는 그 날 잡은 물고기나 짐승으로 해결한다. 이동수단은 굳은살이 베긴 맨발. 비누나 세제 없이 그저 강물에서 씻고 멱을 감는 게 전부다. 맑고 청량한 숲 속에서 뛰어놀고 사냥을 배운다. 가족과 친지, 이웃이 정서적으로 밀착된 관계를 형성한다. 부족의 어른은 풍부한 지혜와 경험으로 마을을 다스리고 아이는 아이답게 명랑하게 자란다.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만 해결하면 되니 머리 아플 일이 없다.

  그들에게는 자연이 전부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 안에서 생활하며 자연 속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하루에 쓸 분량만큼만 자연을 누린다. 욕심을 내거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자연은, 자신들을 먹이고 입혀주는 아버지의 존재와도 같다. 헌데 바깥의 인간들에겐 그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금전적 가치를 가진다. 이 값진 자원을, 절대 그대로 놔둘 수 없다. 원주민들처럼 ‘하루에 쓸 만큼만’ 가져간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지금 당장 캐어가서 모조리 상품화 시키고 시장에 잽싸게 내다 판 후 재화로 만들어야 한다.

  숲의 골자를 이루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큰 나무들이 인간들의 욕심 앞에 맥없이 쓰러져갔다. 바다 속 자원들이 무차별적인 포획으로 인해 바닥나, 그것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원주민들이 굶어죽게 생겼다. 산 속 희귀한 식물도, 천연기념물이라는 짐승들도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또한 인간은, 제 멋대로 원주민의 삶을 미개하고 야만적이라 단정 지어 그들에게 새로운 의식주의 틀을 제공했다. 자동차와 자전거를 강제적으로 수출하고,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의복의 필요성을 어필하며 자연친화적이었던 그들의 옷을 뜯어내고 소매와 버클이 달린 색색깔의 셔츠, 바지를 입혀주었다. 인간의 언어로 그들을 계몽하려 애썼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그들에겐 재앙이었다.

  얼마 전 MBC에서 방영된 <아마존의 눈물>, EBS의 한 다큐멘터리-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 <원령공주>와 최근 개봉한 <아바타>, <늑대와 함께 춤을> 그리고 <포카혼타스>, <라스트 사무라이>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황폐해진 자연 앞에, 자연의 일부였던 원주민들의 망가진 삶 앞에 나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했다. 태초의 인류인 아담 역시 에덴동산에서 삶을 영위했다. 하나님은 인간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다.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고,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애초에 우리의 이용을 목적으로 만들어놓으셨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회의이겠지만, 망가져가는 자연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임해야 하는지, 정말 ‘당연하다’고 느껴도 되는지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기 위해 신(神)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면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걸러내게 된다. 그렇게 생각이 모아지다 보니 자연(nature)이나 박애주의 따위는 ‘하나님을 배우는 수단과 도구’라는 미명하에 뒷전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자연을 무자비하게 휩쓰는 인간들의 독선과 오만함이 이 같은 기독교적 자연관으로부터 배태된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을 져버릴 수 없다. 크리스천들이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에는 관대하면서 자연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에는 무관심한 까닭도 이 때문일까. 자연을 이용하면서 상생한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 되는 걸까. (조금 비껴간 이야기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아 문제, 쉼 없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뭐, 이런 부분은 그냥 ‘그들은 그렇게 살기로 예정되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치부하고 넘어가도 되는 건가? 그렇다고 하면 속상할 것 같다. 우리는 성경신학적으로 어떻게 그 부분을 해석할까? 나는 아직 신앙적으로 정리가 잘 안 된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텅 빈 심해를 더듬거리며, 식량을 찾던 한 원주민 아버지의 표정이 떠오른다. 인간들이 싹쓸이한 덕에 먹을거리라곤 찾을 수 없는 깨끗한 바다 속. 호흡이 가빠 곧 수면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배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식구들을 생각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자연을 이용하고 누군가는 이용할 자연을 빼앗겨 굶주리고.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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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통한 치료 <메리와 맥스>
삭막한 ‘관계 맺기’의 모진 결말 <핸드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