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5-08-23 12: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내 욕망은 정당한가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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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원초적인 것이든, 고상한 차원의 것이든. 욕망은 삶의 동력이자 자극제다.
물론 정당하지 않은 욕망 또한 존재한다.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의 종국이 ‘파멸’이기 때문이다. 비대해진 욕망은 고삐 풀린 말처럼 이리저리 주인을 끌고 다닌다. 욕망을 적당히 손안에 굴리며 행복해하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사라지고, 욕망이 주체인 것이다.
은행의 아르바이트생에서 계약직 사원이 된 리카는, 영업 업무를 도맡아 개인 고객들의 집을 드나들며 상품을 판매한다. 고객들이 맡긴 적금(현금)을 은행으로 가져가 입금하는 일이 주 업무다. 은행과 고객에게 신뢰를 구축하며 능력을 인정받을 무렵, 한 노인 고객의 손자인 대학생과 면을 트게 된다. 학비가 없어 휴학해야 하는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것처럼 긴장되고 겁이 나는 것도 잠시, 그녀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한다.
이름만 들어도 가격대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외제 차를 사주고, 하루에 몇 백만 엔을 호가하는 호텔 방을 잡아 놀고, 새 컴퓨터와 새 집을 덥석 사는 등 소위 있는 사람들도 쉽게 하려 하지 않을 무계획성 폭탄 소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녀는 중학생 때도, 아버지 지갑에서 훔친 돈으로 지구 반대편 어린이를 돕는 구호활동을 했다. 그 일로 인해 모금을 중단하겠다는 수녀원장의 말에, 돈을 훔쳤든 뭐든 좋은 일을 하는 게 우선이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그녀에겐, 다른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과정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이 점점 비뚤어진 방향으로 움직이고 가속도가 붙을 때도 스스로를 속이며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밤새워 놀다 집에 들어가던 날, 하늘에 어렴풋이 떠 있던 달을 손으로 지워본다. 손톱 끝에 걸려 조금씩 사라지는 그 달은 가짜였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게 다 가짜니까,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치는 것도 이렇게 폭주를 하는 것도 다 허구라고, 괜찮다고.
그녀 내면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를, ‘이건 아닐 거야’라는 속삭임을. 그래서 자신을 속이고 또 속고 타인까지 속여 넘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욕망의 관성은 대단해서, 그 궤도에 진입하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휘말려 버린다. 욕망은 공평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욕망을 ‘다룰’ 수 있다. 그들은 욕망의 원인과 결과를 통찰해냄은 물론, 왜 그것을 욕망하는지 그게 정당한지 아닌지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욕망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을 먼저 알 때 더 깊어질 수 있다.
영화나 책, 주변의 인물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은 참 다양한 욕망을 다양한 방법으로 구현해 가신다는 생각이 든다. 쓸모없는 욕망은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유익하기만 한 욕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을 흠모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교회를 세워가는 데 애쓰는 이 욕망만큼 충분한 칭찬이 기다리는 욕망도 드물다. 정신과 혼을 쏙 빼놓을 호화로운 물질문명의 시대에 살면서 소비와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게 더 특이한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한 끝 차이로 속물이 되며 그것이 결코 흉이 아닌 세상에,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욕망을 갖고 살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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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굿 윌 헌팅
고수의 손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