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0-09-28 17:1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진짜’라는 하나의 확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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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결함, 몰양심적, 뻔뻔함. 타인의 불륜은 그들에 대한 부정적 가치평가를 동반하며 혐오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사람은 사랑의 바깥에 서면 냉정해지지만 빠져 있으면 민망할 정도로 주관적이 된다. 사랑의 주체들 혹은 불륜 남녀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옹호하고 변호하느라 스스로 순교자를 자처한다. 이는 타인으로 하여금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마치 시간과 역사를 거슬러 오늘에 존재하는, 오로지 단 하나 뿐인 숭고한 로맨스처럼 여기는데 이는 매우 지루하고 천연덕스러운 썰풀이 임에는 틀림없다. 어쨌건, 일반의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타자의 사랑 -특히 불륜-에 크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란 얘기다.

  그러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에게, 연민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갈등과 죄책감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려서도 아니고, 관습과 이치에 따라 상대를 처연히 놓아주어서도 아니다. 

  메릴 스트립이 분한 프란체스카는 평이한 일상을 보내는 중년의 여성이다. 그녀는 다소 괴팍하고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오랜 세월을 함께 산 부부라면 누구나 그렇듯 적당한 미움과 적당한 짜증 그리고 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적당히 헌신적이며 집안일을 함에도 마찬가지이다. 크게 일탈을 꿈 꾼 적도, 불행한 적도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식구들이 며칠 집을 비운동안 사진작가 로버트를 만나게 된다. 황혼의 들판에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둔 채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는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와 사랑에 빠진다. 짧은 시간동안 그들은 행복했고 두려웠고 고통스러웠다. 떠날 채비까지 마쳤던 프란체스카는 결국 자신의 삶이 아닌 가족의 삶을 택하며 집에 남는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그 솔직함을 은폐함으로써 사랑을 지켜냈다. 프란체스카가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했더라도 그녀를 뼛속까지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비난을 당해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로버트와의 사랑을 그녀는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로버트 또한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 뒤로도 둘 사이를 이어주는 편지는 그들의 감정이 한 때의 불장난이 아니었음을 애틋하게 보여준다.

  프란체스카가 죽기 전까지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 아닌 로버트였다. 로버트 또한 자신에게 평생의 확신은 오직 프란체스카에 대한 마음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남들과 다른 이유가 나온다. 그들은 불륜을 저지른 주책 맞은 늙은이들이 아니라, 더 일찍 만나 사랑했어야 했을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하고 진실한 감정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진짜’라면, 여태껏 ‘진짜’를 찾으려 전전긍긍했던 시간과 앞으로의 인생이 한 순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실감나는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사랑을 ‘진행’하는 것보다 ‘지켜’가는 편을 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더욱 현명한, 사랑의 확실성을 명료히 하는 방법이었는지도.

  하나님의 ‘진짜’도 우리에게 있다. 성경으로 주어졌고 목사님들로 하여금 성경의 원리를 찾아내게 하셨다. 헌데 그 진짜를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여태껏 지켜온 믿음을 부정당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넘어선 ‘진짜’의 희열을 맛보게 해주시고, 덜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을 섬기게 하신다. 더 사랑하는 자의 범주에 들어 얼마나 행복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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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거지라서 행복해요, <무장원 소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