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3-09-30 20:3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멈추지 않는다. 사라질 뿐

영화 <설국열차>


영화를 본 사람들마다 해석이 다양하다. 이런 감상 저런 느낌이 난무하며 도대체 ‘정답이 뭐야?’ 하고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 <설국열차>. 호불호도 극명하게 갈린다. 좋은 이유, 싫은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그네들의 말에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은 무엇일까. 대체 이 영화가 무엇이기에 누군가를 설레게도 하고 우울하게도 만드는 걸까.
지구의 온난화를 막기 위해 쏘아올린 물질의 부작용으로 인해 인류는 빙하기를 맞게 된다. 무시무시한 추위와 눈발 속을 힘차게 달리는 열차. 이 열차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멸종된 모든 생물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들이 탑승한 꿈의 기차이기도 하다.
그리고 꼬리 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곳은 그야말로 비극과 빈자의 도가니탕. ‘살’색을 찾기 힘든 꾀죄죄한 얼굴에, 끼니마다 먹는 것이라곤 바퀴벌레로 만든 양갱(영화 속에서는 단백질 블록이라고 하며, 물론 그들은 이 음식의 재료를 모른다)이 전부이다. ‘조건’에 맞는 꼬맹이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위 칸 나리에게 끌려가고, 자신의 아이를 돌려달라며 신발을 던졌던 아버지는 팔이 잘리는 체벌을 받는다. 주인공 커티스는 ‘혁명’을 계획한다. 현자 길리엄의 도움으로 꼬리 칸 사람들을 이끌고 가장 앞 칸, 엔진이 있는 곳으로 하나하나 정복해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아니, 커티스와 남궁민수 부녀를 제외하곤 ‘다’ 죽는다. 그들을 막으려고 도끼를 들고 무장했던 군대도 몰살당한다. 그렇게 처절하게, 사랑했던 동지들을 잃어가며 도달했던 마지막 칸엔 ‘절대 엔진’의 지배자 윌리엄이 웃고 있다. “수고했어. 자네의 계획부터 쿠데타까지 모든 것은 길리엄과 나의 계획대로 된 거야.” 설국 열차는 거대한 생태계나 다름없다. ‘균형’. 누군가가 태어나면, 그 수 만큼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그 역할의 선봉에 커티스가 섰던 것이다. 그 정교한 균형의 마지막 톱니에, 차출되어 행방을 알 수 없던 꼬마 아이가 있었다. 몸을 펼 수 없는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엔진을 조종하며 구해주려고 손을 뻗어도 희미한 눈으로 제 할일을 할 뿐이다.
커티스는 절망한다. ‘개혁’해보려고 여기까지 왔건만, 그 모든 것들이 계획의 일부였을 뿐 아니라 자신이 윌리엄의 자리에 앉게 되어도 윌리엄처럼 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그 때 남궁민수가 말한다. 꼭 여기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바깥세상도 있다고. 그리고 윌리엄은 기차를 폭파한다.
고요한 설국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남궁민수의 딸과 엔진 칸의 꼬마. 그들을 쳐다보는 곰 한 마리.
체제는 붕괴되었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 영화에는 결정론(예정론)과 운명론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자신들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불가항력이었다. 신념으로 밀어붙인 일이 어떠한 절대자의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밀려오는 좌절과 허탈이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가련하다. 절대자의 존재와 위용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행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절대자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해 줄 거란 희망을 의탁하고 사는 인간은 더욱 처량하다. 고작 자신의 수준에서밖에 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신과 인간에게 피차 곤란한 일이지 않나.
모든 삶과 인생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정해져 있다는 것이 과연 고통스러운 일일까? 설령 우리가 꼬리 칸에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느 곳에 누구와 놓여져 있던, 우리의 목적은 ‘똑똑해지는 것’ 같다. 나를 이렇게 꼬리 칸에 밀어 넣은 절대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비극이란 없게 되지 않을까. 진짜 비극은 사실 추위나 배고픔 가난보다 앞선, 절대자에게 ‘외면당함’일 테니까.
아무튼 오랜만에 만난, 생각의 ‘재료’가 풍부한 영화였다. 과연 열차 밖, 체제 밖은 유토피아인 건지 그리하여 평론가들 말대로 무정부주의를 조장하는 영화인지. 극한의 피로감을 느낀 커티스가 윌리엄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고 끝내 열차를 폭파한 까닭은 진정 박애주의, 이타주의 때문인지. 체제를 붕괴하려고 했던 그가 체제를 재건하는 건 왜 불가능했던 건지. 과연 자본주의 시스템은 언제까지 견고할 것인지.
여담이지만 꼬리 칸 사람들의 비극보다 1등 칸 사람들의 평화에 더 이입이 되었다. 나는 영원한 세계에서 절대자의 이쁨을 받으며 안온함을 누릴 테니까. 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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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
굿 윌 헌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