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4-12-28 18:3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knocking on heaven’s door

죽음, 끝보다 시작에 가까운


삶은, 죽음을 염두에 둔 단어이다. 움직임을 멈추고 나에게 귀를 기울이면 미세한 호흡과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살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죽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삶에게 그러하듯 애정과 의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죽음이란 그저 삶의 종착역, 두려운 것, 누구나가 겪지만 나랑은 먼 이야기 같은 것, 되도록 나와는 상관  없었으면 하는 것, 고통스럽고 슬프고 외로운 것으로 인식한다.
가치중립적인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죽음은 항상 빛이나 아름답고 따듯한 것들의 대척점에 서 있다.
죽어본 적(?)이 없는 우리는, 그에 대한 정보도 축적된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삶의 방법론이나 잔꾀도 죽음 앞에선 통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며, 결코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 막연한 공포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죽음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불안이 아닐까 한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일반인의 사고 저변에 잠재한 근원적인 두려움이기도 할 터.
<knocking on heaven’s door>의 두 젊은이는 시한부 인생이라는 접점 하나로 영화의 고삐를 끌어간다. 일이 꼬이는 바람에 마피아와 엮여 시종일관 도주를 해대다 결국 해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마지막 시야에 펼쳐진 것은 바다뿐이다.
1인 1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모든 순간과 사건 앞에서 결국 처절한 혼자일 수밖에 없다. 시한부라는 결정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고, 전우애보다 더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을 그들이지만 죽음 앞에선 각각의 개별자일 뿐이다. 그래서 쓸쓸하다. 영화 속 풍운아들이 음악과 함께 한 순간에 화면에서 사라져 버리듯, 나의 존재도 저토록 새카맣게 지워져 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죽음은 끝도 존재의 상실도 아니다. 죽음은, 다음 차원의 삶으로 향하는 관문일 뿐이다. 그 삶은 이렇게 병들고 늙고 쇠해가는 육의 옷을 벗어야 시작할 수 있다.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아무것도 한 게 없음에도 주님으로부터 수고했다는 치하까지 받아가며 달콤한 안식을 무한히 누릴 수 있다.
외할머니의 병환이 깊어 긴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함께 병실을 쓰던 환자가 죽었다. 자식들이 통곡하는 소리를 들으며, 외할머니가 동요하시진 않을까? 영 조바심이 났다. 외할머니 역시 며칠 안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위중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하셨다. 편안해,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바울의 이야기를 하시며 달려갈 길을 다 달려오셨고 일평생을 선한 싸움 싸우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이제는 주의 품에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쉬시라는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다. 함께 기도하던 모두가 울었다. 할머니만이 맑고 또렷한 눈으로 ‘고마워’를 세 번이나 하셨다.
궁극적인 위로는 그런 게 아닌가 한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있음을 아는 것. 그곳에서 내가 또 한번 주님의 일부가 되어 외로움 없이 영원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말이다.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리하여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게 아니라.
삶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살고 싶어 바둥거리는 모습을 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그렇기에 더 서글픈 인간의 면면이니. 그러나 원대로 삶을 지속할 수도, 삶에서 맹렬히 그러쥔 것들을 챙겨 가져갈 수도 없음을 안다면 무언가를 놓을 줄 아는 너그러운 포부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모인 곳의 공기는 다르다. 꾸밀 수 없는, 노골적이리만치 명징한 체념과 회한이 서려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아는 사람은 달랐다. 담대하고 평화로웠다. 오히려 우는 자식들을 울 거 없다 달래셨다. 그게 바로 신앙의 힘이자 저력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에게만 허락하시는 마지막 특별한 선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죽는 순간에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신의 신앙과 마음의 평화를 끝까지 지키신 외할머니가 참 멋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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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 다큐프라임> 인재란 무엇인가
달콤한 거짓과 잔혹한 진실, 당신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