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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2-23 21:0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EBS < 다큐프라임> 인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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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을 앞둔 다섯 젊은이가 주인공인 EBS의 다큐 프로그램이 있다. 그들은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조벽 교수 등의 멘토와 함께 ‘인재’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인재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학식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일생일대의 막중한 사건(?)인 취업을 대면한 취업 준비생들에게, 인재란 곧 ‘대기업’의 이미지와 직결된다. 사실 대학생이 곧 취업 준비생이라는 공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기도 하다. 대학의 의미, 대학생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떠안고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인재’에 대한 물음이 보인다. 정말, 인재란 무엇일까?  눈에 띄는 지원자가 있었다. ‘성공’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고 있는 남학생이었다. 학창시절에는 상위권의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는 북경대학이라는 명문으로, 인턴활동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하는 중이었다. 조벽교수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가 인재라 생각하냐고. 그는 변호사 같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모든 변호사가 다 성공한 사람이냐는 날카로운 반론에 그는 답한다. 아니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변호사가 성공한 사람이지요.  그는 ‘성공’이나 ‘최고’에 자신만의 의미를 따로 정립하지 않은 채, 사회와 학교에서 주입하고 만들어낸 의미를 검증없이 체화시켰다. 1등으로써의 성취감 보다는, 1등을 했을 때 느껴지는 부러움의 시선과 말들에 집중했고 그 결과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게 되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그는, ‘내가 대기업 임원이라면 당신을 뽑지 않겠다’는 한 패널의 한마디에 충격에 빠져 휘청인다. 자존감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울먹인다. 그의 고백은 결국, 자신의 자존감이 모두 ‘타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했다. 한 인간의 -오만에 가까운- 자존심이 저렇게 순식간에 쪼그라들 수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타인의 인정에 기댄다는 것은 내가 살 집을 모래로 짓는 것과 같은 행위가 아닐까. 나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주도권을 고스란히 남에게 넘겨주는 짓 말이다. 그러니 상대가 조금만 변덕을 부려도 마음이 지옥일 수밖에.  또 다른 지원자는 지잡대(지방에 있는 대학을 비하하여 일컫는 말) 출신이다. 그녀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주눅이 들어있다. ‘나는 지방대생이야’라는 타이틀 아래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눈빛, 표정, 말투, 행동 모든 것이 우물쭈물. 그녀는 자신을 이루는 무수한 요소들 중 지방대를 택했고,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지방대생인 나’로 규정했다. 위축되는 게 당연하다.  또 한 명, 법조인이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서울대 법대생이 있다. 고시를 준비하는 그녀는 지금에서야 ‘나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부딪쳤다. 죽도록 공부해서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 딱 일주일만 좋았다고 했다. 이 고시를 패스해도 딱 일주일만 좋을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다시금 질문을 던져본다. 인재란 무엇인가. 이 프로그램은 인재가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변화하고 성장한 지원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하나는, 인재란 ‘자기(自己)’가 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분명한 사람들은 ‘왜’에 강하다.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 일을 할까, 나는 왜 살아갈까, 나는 왜 이것을 추구하고 가치롭게 여길까. 이 ‘왜’를 추구하는 과정에 성경공부를 병행하면 더 깊고 풍요롭고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유와 사색의 여정인데, 이는 철학과 맞닿아 있으며 그에 필요한 지혜의 정수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분명하다, 자아가 서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나는 그것이 ‘자유를 누릴 줄 안다’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집착함이 없이 홀가분해야 한다. 홀가분해지려면 내가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곧 나를 알아야 한다. 설교 시간에 자주 들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나’, 그 진짜 의미를 이제 좀 알 것 같다. 상대세계에서 상대적 우월감, 열등감 없이 자족할 수 있는 방법, 그 압도적인 충만감을. ‘하나님이 하신다’의 깊은 의미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담대함이었음을.  다른 걸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홀가분하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와 가치발견. 그리고 나의 존재와 가치를 상정한 신에 대한 이해.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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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드라마 <고교입시> - ‘정합성’이 주는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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