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5-02-08 14: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테러에 대한 테러리즘: 허무주의의 순환 구조


2015년 1월 7일 수요일 오전 11시 30분 프랑스 파리 소재 시사 풍자(諷刺)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사무실에 알제리 출신의 이슬람 무장 형제 대원을 포함 무장 괴한 4명이 총기를 난사, 12명의 기자와 만화가, 직원과 경찰관들이 숨지고, 20여 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언론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이 테러는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실은 것이 테러를 불러온 원인이었다. 같은 달 11일 세계 50개국 정상과 100만 명이 파리에 모여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파리 행진’을 통해 언론 자유의 정당성을 위한 의지의 결사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도 했다. 국가들뿐 아니라 유럽 연합의 국민들도 이슬람에 반대하는 거국적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다. ‘서양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Patriotic Europeans against the Islamization of the Occident/PEGIDA)’이 그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적극적 운동은 언제나 두 방향으로 진행한다. 어떤 사건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선과 악의 축을 우선 결정해야만 하는 일로 이후 모든 운동 방향은 적대적 관계를 야기하고 상대 진영을 몰살해야 한다는 참극의 끝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특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현대는 선과 악의 관점으로 어떤 무엇도 평가할 수 없는 시대다. 그야말로 모든 사건들은 다양성의 필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답을 찾지 말아야 생존이 가능한 시대다.
이러한 태도는 일찍이 허무주의 창시자 니체가 자신의 저서에서도 제목으로 칭한 바 있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라는 책에 부제를 ‘미래 철학을 위한 서곡’이라고 붙인 바 있다. 즉 현재 진행 중인 허무주의 시대의 특징을 예고한 것이다. 선과 악의 구도를 넘어서야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시대의 본질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왜냐하면 허무주의에서는 최선과 최악이라는 것을 결코 분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극과 극의 참담한 사건들이 반드시 공존하며 함께 분출하는 불가피한 숙명과 비극을 예고한다는 말이다. 지켜야 할 인간의 특별한 가치도, 보존해야 할 불변의 자산도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전복과 파괴를 무한히 개방하여 가치 수립과 파괴의 과정이 무한 되풀이 될 것이라는 비극의 논리를 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테러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허무주의가 규정하고 있는 인간 본질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욕망의 바벨탑을 쌓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서구 중심의 가치관을 최고로 구가했던 서방 문화는 혹독한 저항문화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허무주의자의 심각한 시대 진단이다.             
테러리즘에 대해 모든 인류 사회는 ‘인간 존엄성을 위한 인간 상호 간의 무한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니체의 허무주의는 이러한 발상이 가져올 결과를 위험스럽게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엄성의 틀로서는 테러리즘의 순환이 가져올 시대를 결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너 가지 이상의 정신 질환을 한 몸에 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란 없다. 현대를 ‘절대가치의 절대 불허의 시대’로 규정하는 니체의 시대 비판적 진단을 따르면, 우리 모두는 지적 염세주의자가 되고 있으며 심각한 지적 우울 장애를 보이고 있는 치유 불능의 환자들이다.
이러한 병폐를 야기한 것에 대해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대개 서방 중심의 인간 이해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서방은 자기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 ‘절대선’과 ‘절대악’의 선명한 선을 그었다.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믿는 유럽인들이 자신을 ‘문명인’이라면 한다면, 아직도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얽매인 자들은 근본주의를 맹신하는 야만인이 된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허무주의는 우선 세계와 역사 이해에서 무엇보다 자기 이해관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 더 심하게는 어떤 희생을 요구하더라도 ‘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때 허무주의 시대의 정당성을 ‘알’ 수 있다는 냉정하고 비정한 쪽지를 건넨다.
현대의 특징을 깊이 각인시켰던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과 피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폭압,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3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 침공, 2004년 프랑스 공공기관의 무슬림 베일 착용 금지와 2005년 덴마크의 유력 일간지의 ‘무함마드=테러리스트’ 조롱 카툰 등 서방 국가는 이미 자신들이 겪어야 할 테러리즘의 반복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테러리즘의 구조를 보면 자기 면역 체계를 어느 사건보다 스스로 잘 갖추고 있다. 그 증거는 많은 테러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 주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테러를 주도하는 권력 실세는 더욱 익명화하여 자신의 방어기제를 더욱 견고하게 구축하며 세계 지배에 대한 확신을 키운다. 일시적으로 수백만이 모여 ‘나도 샤를리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이미 테러리즘은 태연하게 준비된 자폭 테러로 자신에게 준비된 운명을 순교자의 이름으로 사랑할 채비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몸 날리며 순교자연하는 처절한 종교적 몸부림은 엘리야의 눈으로 보면 자기 파멸의 징후일 뿐이다. 하나님의 냉엄한 심판이 시작되는 전조일 것이다. 

27 정오가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큰 소리로 불러라. 그가 신이 아니냐. 그가 생각에 빠졌는지, 떠나갔는지, 여행 중에 있는지 모르지 않느냐. 혹시 그가 잠들었으면 깨워야하지 않겠느냐?”하니, 28 그들이(바알 선지자들)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의식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를 때까지 몸에 상처를 내었다. 29 정오가 지나 곡식제를 드릴 때까지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었으나 어떤 음성도 없었고 어떤 응답도 없었으며 어떤 기척도 없었다.(왕상 18:27~29/바른성경)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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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와 테러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