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6-06-26 14:1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배우고 때로 익히면


논어의 첫 장인 학이(學而)의 첫 단락의 구절들이다. 그 해석은 이렇다.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서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을 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배움의 세계는 무한하다. 배움(의 바다)에는 끝이 없다(學海无涯, 학해무애). 배움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주자는 배움을 ‘본받음’(效)으로 보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행동, 자연의 모습, 세상의 모든 일들로부터 배우는 자 자신이 본받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본받음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된다. 그것은 너무도 다양할 수 있기에 한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다. 주자는 본받음의 예를 새끼 새가 어미 새의 날갯짓을 하는 데서 찾았다. 새는 태어나서부터 날개 젓기를 배워서 죽는 날까지 날게 된다. 날개 젓기를 본받고 또 본받아 실제로 날기를 계속하는 것이 익힘(習)이다. 때(時)는 새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생명을 이어가는 때요, 살아 있으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를 말한다. 잠을 잘 때는 날개를 젓지 않겠지만 새는 꼭 필요할 때 날개를 젓는다. 그러므로 때는 “꼭 때에 맞게”라거나 “꼭 알맞은 때”라고 번역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이 적당한 때를 바르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열심히 본받고 익히고 또 익히는 자만이 무의식중에라도 그 때에 맞출 수 있다. 때에 맞게 연습하고 또 연습한 사람이 그 연습을 통해 즐거움의 경지에 이를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본받기) 시작해서 익히고 또 익혀 어느 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피아노가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즐겁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누군가가 농구를 배우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슛을 잘 넣게 되었는데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는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인물이 공자 자신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벗은 단순한 놀이 친구가 아니라 도를 찾아 즐기는 자를 가리킨다. 그가 먼 곳에 살고 있는데 같이 도를 찾고 있는 본문의 나를 찾아온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쉽사리 벗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벗이라 하더라도 아무데도 연락할 곳이 없고 딱 정해서 한 곳에서 만날 수도 없으며 만날 시간을 정할 수도 없었다. 그냥 무작정 가서 만나는 것 이외에 달리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벗을 만나는 것은 소위 하늘이 정해준 만남이라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는다. 두 벗이 서로 만나서 그때까지의 배워온 것과 익힌 것들 그리고 누리게 된 즐거움의 내용들을 가지고 대화한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를 말해 간다. 두 사람이 서로 어찌 앞에 있는 벗의 소중한 지혜와 지식의 고상함을 모를 수 있겠는가. 그들만이 통하는 순수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에 빠져 기쁨을 만끽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면 역시 공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깨우침의 경지와 교제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알아주지를 않는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기에 도는 아는 사람은 범인들이 사는 생활방식과 다르다. 그 사람은 범인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본받아 익히기를 계속하며 즐거움을 누려간다. 그런 사람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역시 넌지시 공자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인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배우도록 하자. 하나님의 마음과 행위를 본받아 익히자. 생명을 주시며 생명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희생과 사랑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생명이 있는 순간마다 그렇게 본받아 익히자. 그리스도인은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을 찾아 교제해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친구이시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이들의 대화는 정말 진실하고 평화롭기에 참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원망스러워도 하나님께 자신의 원망을 풀어놓아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 나의 원망을 쏟는 것은 아무런 문제를 가져오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원망을 사람을 향해서 했을 때는 잘해야 본전 정도이고 대부분은 엄청난 손실을 준다. 그러므로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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