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6-09-25 12:0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가 본 ‘자유의지’: 강한 힘의 상승 욕구


니체는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요인을 몸의 충동으로 본다. 충동의 현장인  몸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 의지가 구체화하는 몸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원리와 같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몸을 통해 동물적 본능의 발산에서부터 신과 같은 존재도 흉내 내며 온갖 허구를 만든다.

이렇게 니체는 인간의 몸을 벗어난 실체와 같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며 몸으로부터 독립된 ‘자유 의지’ 또한 부정한다. 감각 기관인 몸에서 분리된 자유의지가 가능하려면 모든 행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그 행위를 규정하는 ‘원인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자기원인자’로서 자아(自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원인은 지금까지 사유된 것 중 가장 심한 자기모순이며, 일종의 논리적인 강요이며 부자연스러움이다.” * F.Nietsche, Jenseits von Gut und B se, Kritische Studienausgabe, hrsg., G.Colli und Montinari, 15 B nde, Berlin/New York, 2008, [21], s. 35. 즉 서양 문법 구조에서 서술어에 대한 주어가 반드시 있어야 하듯이, 행동에도 그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날조한 것이 바로 ‘자아’다.

니체에 의하면 ‘생각’이란 ‘일어나는’ 것이지,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란 현상에서 인격적인 최종 원인자를 날조한 행위는 정말로 서구 형이상학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요 범죄다.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자아는 문법 구조에 얽매인 논리적 ‘가정(假定)’일 뿐이다. 이것을 과도하게 신봉한 대표적인 종교가 서양 기독교이며, 인간 내면에 ‘원죄(原罪)’를 만들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가 인간임을 날조한 종교가 바로 서양 기독교다. 니체가 볼 때 서양 기독교는 문법을 실체화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언어생활에 필요한 개념을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가공하는 습관은 언어적 동물인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드러난 현상에 대한 서술어에 대해 주어가 필연적이듯, 현상에도 그것을 유발시키는 원인자를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습관이다. 자신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인격체로 고정시킨다.

이렇게 서술어에 대해 주어를 만드는 습관에 따라 현상에 대한 궁극적인 ‘하나’의 원인을 정하는 행위는, 다양한 힘들의 상충과 충돌의 현장인 몸의 실상을 왜곡하는 원인이 된다. 인간의 몸은 생물학적이며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다양성이 지배한다. 니체는 몸의 활동을 이끌어가는 이러한 배경을 다양한 힘들의 충돌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물론 충동들의 배열은 개념의 논리적 배열로는 규정할 수 없다. 니체에게 분명한 것은 힘의 배열로 갈등과 투쟁, 무질서와 혼돈이 발생하는 것은 몸이 살아있는 한 발생하는 필연적 사건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몸을 지배하는 충동은 모순과 대립, 갈등과 투쟁의 양상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충동을 합리적 이성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시도다. 그야말로 충돌의 현장이 유한한 몸이라는 사실 밖에는 감각적으로 분명한 것은 없다.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지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폭발적 반응을 동반하는 충동이더라도 그 동기는 설명할 수 없다. 현상만 감각적으로 분명할 뿐이지 최종 원인은 더더욱 밝힐 수 없다.

분명한 동기를 알 수 없는 충동에 대해 책임을 지우는 것은 몸의 구조에 대한 왜곡이며 억압이다.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충동 구조인 몸의 현상에 대해 원인자로서 ‘자아’ 운운은 명백한 날조이며, 그 자아에 고유한 능력으로 ‘자유의지’ 운운은 인간 본성과 본능에 대한 왜곡이다. “생명체가 존재하는 곳에는 갑작스럽게 힘이 폭발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이 ‘자유의지’다.” * KSA10, N, 16[20], s. 506./김바다, “니체의 자유 개념 이해”, 니체연구 제29집, 2016년 봄, 68쪽 재인용.

자유의지의 활동처럼 보이는 명령하거나 복종하는 행위들은 상충하는 충동들이 서열화한 것이다. 어떤 고유한 인격체가 있어서 그러한 일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의 자극 정도가 다르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기분과 이에 대한 만족으로 인해 ‘힘의 상승’을 경험하면서 행위의 장애물이 없는 순간 그 행위의 만족감에 젖는다. 그 투쟁 현장에서 상승한 힘의 최종적인 승리의 느낌, 바로 이 순간이 ‘자유의지’로 둔갑한 것이며, 이러한 자유로운 의지를 경험한 당사자가 순간 경험하는 것이 이른바 ‘자아’라는 것이다. 즉 몸을 지배하는 더 강한 힘의 느낌이 ‘자유의지’이며, 이때 이 느낌을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당사자가 바로 ‘자아’다. 이 자아가 그 힘의 지속을 위해 끊임없이 더 큰 힘을 원하는 본능 속에 ‘자유’라는 허구가 항상 자라고 있다. 정말로 무겁게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기약 없는 충동질의 연속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마 11:28).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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