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7-03 21:3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열하나. 동방 정교회의 세속화 : 차르의‘러시아 제국’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18:2)

2. 러시아 제국의 발흥 :
  종교를 엎은 ‘짐승권세’의 성장 

서구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6세기 말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 내에서 무슬림 통치에서 자유로운 유일한 곳이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권력자들이 그곳을 ‘제3의 로마’로 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서유럽 제국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비롯한 서유럽 전역에서 황제의 권위도 교황의 권위도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리고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천년 통치를 뒤로하고 1453년에 투르크 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두 번째 로마도 망한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 번째 로마’에 대한 요구와 희망은 당연했으며 이를 ‘모스크바 대공국’이 대신하려고 했다. 노아가 말한 야벳족 후예들의 동쪽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유럽에서 성경권위 회복 운동인 종교개혁이 서유럽으로 확산되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동안 야벳 족의 후예들은 마지막으로 비성경적 정교회를 중심으로 제3의 로마에 대한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제국에 대한 영화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지성적 측면보다는 건물 즉 종교 건물을 짓는 데 집중했다. 보이는 것을 통해 인간들의 종교적 심성을 만족시키려 했던 종교 문화가 서유럽 종교개혁 당시 모스크바대공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흐름이었다. 서로마 교황청의 재집권을 유럽과 세계에 확산시키려는 예수회가 동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의 동북쪽으로 진출했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리스 정교회가 국가 종교로서 통치의 기반이 되었다.(300)
그리고 1667년 로마노프 왕조가 이끄는 모스크바대공국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장악하게 된다. 폴란드를 제외한 북유럽은 모스크바대공국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서방의 로마가톨릭과 맞서서 동방정교회를 북유럽의 국가 종교로 확산시켰다. 로마제국은 종교개혁 시기에 제3의 로마까지 분열하면서 서방과 동방의 종교 세력도 점점 지역 종교로 전락해가고 있었던 시기다. 이 틈새에 유럽 전역에는 성경권위에 토대를 둔 바른 교회가 설립되고 있었다. 동방정교회는 점점 분열되어 갔으며 이 틈에 러시아 중심의 동방정교회는, 마치 비잔틴제국에서 황제가 종교 회의를 주관했던 것처럼, 러시아 황제 차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모스크바는 자신을 ‘대러시아’로, 우크라이나는 ‘소러시아’로, 벨로루시는 ‘백(white)러시아’로 불렀다. 그리고 점점 성경진리와는 멀어져 간다. 서방의 로마가톨릭이 신학적 이론이라도 전개했던 것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경우가 되었다. 불쌍한 일반 백성들의 영혼은 부패했던 로마가톨릭 체제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더욱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과 종교는 반드시 야합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두 세력은 또한 권력투쟁을 하게 마련이다. 차르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막강했기 때문에 총대주교의 권한은 황제에게 예속되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더욱 철저하게 통제받는다. 영혼은 주교에게 그리고 주교는 황제에게 백성의 몸과 영혼은 모두 황제에게 맡기는 처참한 신세가 된다. 러시아정교회도 정치적으로 이용한 차르의 권력이 (1917년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혁명 전까지) 수백 년간 북유럽을 지배했던 시기가 제3의 로마 러시아제국의 상황이었다. 종교적 의식(儀式) 중심의 러시아정교회는 백성들에게는 신에게 제사 행위를 하는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황제 숭배로 이어지는 결과가 되었다. 명분만 조금 달랐지 교황청 중심의 로마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서유럽에 비하면 종교적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지배체제였다.
이러한 제3의 로마제국 러시아는 표트르 1세(Pyotr Alexeyevich Romanov, 1672~1725)에 의해 독재정권의 틀을 완성했다. 자신을 스스로 모든 러시아인들의 황제라고 칭했으며 역사는 그를 ‘근대 러시아의 아버지’로도 부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러시아를 설계한 장본인이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정당성을 호소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다. 목표가 숭고하다고 판단되면 어떤 비열함이나 잔혹함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자신이 보여주는 통치 기간 동안의 잔혹했던 그의 치적들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세속 권력에 속한 전형적 인물로 로마 제국의 황제들로부터 그때까지 피조물의 자리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권좌에 앉기 위해 제국의 이름으로 권세를 누리고자 했던 ‘야벳 족속의 마지막 후예’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제국으로 변모시킨 표트르 대제의 치적에 대해, 만약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러시아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쉽게 한다. 그가 (초월적인 천상의 나라가 아닌) 그 땅의 현실에 얼마나 큰 제국을 설립하려고 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통치하기 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책들은 대부분 종교서적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었을 때를 기준으로 그의 통치기간에 발간된 책을 조사했다. 대부분 외국 서적의 번역본이었다. 그리고 그 번역본 절대다수가 기술 용어 특히 해양을 지배할 해군력 증강과 관련된 기술 용어들이었다.(307) 제3의 로마 제국을 흑해를 중심으로 건립하려는 야욕을 볼 수 있는 증거다.
이렇게 유럽에서 성경이 번역되고 있을 때 제3의 로마제국 표트르의 러시아는 종교까지 철저하게 이용하면서 그 땅에 자신을 위한 ‘천국’을 세우고 있었다. 서유럽에서 시작한 성경권위 회복 운동이 지중해를 벗어나 태평양을 건너 새로운 신대륙으로 건너가고 있는 동안, 러시아는 천년 묵으면서 두 번이나 망해버린 로마 제국의 허섭스레기를 모아 다시 한번 북유럽에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성경진리에 토대를 둔 교회가 태평양을 건너 인도양을 지나고 중국으로 그리고 황해를 지나 조선으로 향하는 그때, 차르의 제국은 진리회복의 시간을 뒤로 돌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화려하지만 허황된 증거를 ‘표트르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2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기준에 맞는 전통을 좇아 살아야
매사에 자세히 묻는 것이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