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0-05-27 19:3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존재’의 현현(顯現)이라는 ‘현존재’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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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신의 죽음 선언 이후 선악판단의 분명한 기준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 인간 존재의 고귀함과 신성함을 다시 입증하려는 철학자였다. 철학자 하이데거라고 말할 때 그와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이 바로 ‘존재’다. 그가 말하는 존재는 간단히 말해 서구 사회에서 ‘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신의 대체물이다.

  그런데 기존의 철학자와 다른 점이 좀 있다면,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개념에 담긴 이중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분명히 있어서 드러나고 있지만 동시에 은폐되고 왜곡된다는 점이다. 물론 하이데거의 목적은 은폐되어 있는 본질을 밝히겠다는 것이며 왜곡되지 않기 위한 방도를 찾는 것이다. 서양이 모셨던 절대자 신이 죽었으므로 인간의 자율적 창조가 이제야말로 제대로 꽃 피울 수 있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생각의 초점을 ‘삶 전체의 의미가 드러나는 곳’에 집중한다. 그 유일한 장소는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인류 전체의 궁극적 의미가 담겨진 보고(寶庫)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는 존재의 의미를 왜곡하고 은폐한 장소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목적은 인간에게 드러나는 존재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나아가 제대로 인간에게 담아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과 의미를 담고 있는 인간을 특히 ‘현존재’(現存在)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독일어 ‘Dasein(다자인)’의 번역어다. 낱말 그대로 번역하면 ‘거기(da) +있음(sein)’이다. 어떤 장소에 무엇인가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존재의 의미와 연관시켜 본다면, 그 장소는 바로 인간이며, 분명히 있다는 말은 인간을 통해 존재의 본래 의미와 궁극적 목표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현존재는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유일한 장소이며, 이러한 의미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존재로서 인간은 애초부터 무한한 가능성과 본래적 의미를 간직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얼핏 생각하면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간의 삶마저도 무기력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추구했던 절대불변의 가치인 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절대화했던 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부터 존재의 궁극적 의미가 인간에게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마치 기독교적 계시(啓示)처럼, 스스로 드러내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드러나는 이유가 있는 데 바로 ‘현존재’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존재는 현존재로서 인간의 존립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신적 존재이면서 또한 인간의 의지와 정서를 거스를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어야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유한하다.” 하이데거의 유명한 명제다.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신이다. 오히려 모든 곳에 신성한 것들이 깃들어 있어서 자연과 인간을 보존하고 있다는 비인격적 범신론(pantheism)이나 인격적 만유재신론(panentheism)에 가깝다. 이러한 잡신(雜神論)은 어디까지나 유한해야 하며 특히 인간 존재에 절대적 유익을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존재는 가장 고귀하며 신성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존재의 비밀이 드러나는 장소가 현존재이며 현존재를 통해서 모든 삶의 의미들은 신성한 가치들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이제 인간과 신성한 것들의 교감이 일어나는 구별된 신성한 장소가 된다. “이제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이 말 역시 하이데거의 꽤나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이 ‘신’은 성경의 신과는 전혀 상관없다. 앞서 말했듯이 현존재의 의미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숨겨진 수천만 개의 잡신들과 같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건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인간 현존재를 위한 것으로만 의미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거나 창조자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현존재를 통해 존재의미가 드러나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가설은 또 하나의 ‘허구’에 불구하다. ‘지금여기이러한’ 현존재가 이미 존재를 안다는 뜻인 ‘선(先)이해’라는 말은 뭔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속이는 거짓말이다. 인간 내면에는 정말로 있을 수밖에 없는 분명한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자기중심적인 죄성밖에 없다.(창3:5, 22) 이 죄성은 전 인류에게 선과 악의 자율적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옳다고 격려한다.(롬1:32) 봄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던 선악과를 빨리 따먹고 하나님처럼 전능자가 되자고 광기로 흥분했던 인류의 어미 하와처럼, 달콤하고도 매혹적으로 들리는 말과 모호한 눈짓으로 전인류를 다시 한번 정죄와 심판의 골짜기로 끌어가려는 것이 ‘현존재’의 철학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전도서 8장 17절)

<다음 호에는 하이데거의 로고스에 담긴 계시 진리의 심판을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하이데거의 로고스에 내려진 심판
‘신의 죽음’과 ‘기초존재론’의 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