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0-12-29 22:5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의식(意識)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대의 논리학


서양 근대철학은 중세의 기독교 전통을 전면 부정하는 사상이다. 절대자인 신과 교회 권력에 맞서 인간의 주권을 확립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1596~1650)의 명제는 바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신의 의식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신의 존재 여부도 인간의 의식이 좌우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신이란 단어는 추론과정에서 생겨난 파생물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언어의 법칙 즉 논리학에 대한 태도도 근본적으로 바뀐다. 근대 이전까지 언어는 신적 계시를 깨닫게 하는 도구였다. 초월적 존재인 신을 언어의 법칙에 따라서 증명하고 설명했다. 그러나 근대철학은 신의 존재를 의식 활동의 한 부분으로 본다. 이제 논리학의 의미는 의식의 통제를 받으면서 올바르게 생각하는 규칙 정도로 축소된다. 그리고 논리학으로는 의식의 흐름가운데서 불변의 요소를 확보하려고 한다. ‘동일하게 있는 것’, 이른바 ‘영원한 것’의 확보를 위해 논리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근대철학의 눈으로 보면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의식 내에서 만들어진다. 그 의식 내용이 필연적이고 타당한 법칙이 될 때 진리가 된다.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있다는 말은, 예를 들면, ‘모든 인간은 선하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나도 선하다’는 논증에서, ‘나’란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 동일한 존재로서 ‘나’이다. 다시 말해 앞의 삼단논법에서 보듯이 모든 개념들은 추론 과정에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다. 인간으로서 ‘나’와 선한 자로서 ‘나’가 서로 다르다면 추론 자체가 불가능하다. 즉 생각의 흐름 속에는 올바른 추론을 만들어내는 사고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 내면에 있어야 하는 이 법칙은, 근대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파악하고 조정할 수 있는 물질적인 속성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심리 현상은 분명하게 설명 가능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의식 세계는 논리적 법칙을 따라야 하고, 논리적 법칙은 분명한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논리적 법칙이란 인간을 초월한 진리를 다루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만드는 존재임을 확증해 주는 법칙이어야 한다. 논리적 법칙이 의식 속에서 확립되는 한, 진리는 오직 인간의 진리이어야 한다. 진리추구의 대상과 목표는 인간이며, 논리학은 (초월적이며 객관적인 진리를 다루는 법칙이 아니라) 인간 심리발달 과정에 한정된 학문(psychologism)이며, 순수 인간학(anthropology)을 위해서만 의미 있는 분야다.
  그러나 앞의 삼단논법(‘모든 인간은 선하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나도 선하다’)에서 볼 때 두 번째 명제의 ‘나’와 세 번 명제의 ‘나’는 단지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거나 그렇게 요청할 뿐이지 증명할 수는 없다. 문제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서로 다른 상황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논리적 사유 과정에서 동일성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동일하지 않음을 숨기는 행위가 된다. 불변에 대한 요구는 가변의 불안을 억제하는 자기 속임이다.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존재의 비동일성에 대한 좌절은 더 커진다. 이는 결국 불변의 존재가 있다는 확신에 대한 강한 부정을 동반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러한 모순 상황에 주목한다. 하이데거의 목표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인간 존재가 ‘이미’ 궁극적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려고 한다. 인간 내면에는 궁극적 존재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어떤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요소가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데, 자연과학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창3:5)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보게 된다. 인간은 자연과학적 설명의 대상마저도 스스로 형상화한 우상이라고 규정하고, 물리적 법칙을 초월한 순수한 존재, 즉 신과 같은 완전한 존재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신비한 능력의 담지자가 인간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근원을 철저하게 그 내면에서 찾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노력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견고한 우상 이미지만 더해줄 뿐이다.

행17:28~29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다음 호에는 ‘가치추구에 내려진 저주’를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神的 가치추구에 드리운 ‘신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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