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3-07-05 09:4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쉰둘. 네스토리우스파의 양성론과 부분타락론, 인도와 중국으로 전파


“451년 칼케돈공의회는 기독교 교리를 교회를 위한 단일한 꾸러미로 묶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5세기 중엽 현재 이스탄불(당시 지명은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동로마 황제(당시 황제는 마르키아누스, Flavius Marcianus, 450-457 재위)가 기독교 교리를 판정하고 있었다. 당시 신학의 쟁점은 그리스도의 양성(兩性) 문제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황제가 관여한 종교회의가 칼케돈 공의회(Chalcedonian Council, 451년)였다. 황제가 내린 결론은 ‘그리스도는 두 본성-인성과 신성-을 가진 하나님과 동일한 단일한 인격체’였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하게 결합되었다는 뜻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나님과 참인간의 이중 본성(dual nature)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중 본성의 결합 방식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Alexandrian School)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로 대비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물과 포도주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하나의 존재로 상호 결합했다고 본다.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 없도록 조화롭게 결합한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상호 작용의 방식으로 연합되어 있다. 이러한 결합 방식을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규정한다. 한 위격(位格) 안의 신·인성의 통일성으로 존재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에 대해 네스토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한다.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의 인격성은 신성과 완전히 독립적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개체적 인격성과는 완전한 분리를 통해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리를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당했으며 동로마제국과 유럽에서 그 세력을 잃었다. 하지만 현재 이란 지역(당시 사산제국, Sasanian Empire)에서는 포교 활동과 교세의 확장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란 지역에서 교세를 얻기까지 네스토리우스파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조로아스터교 후원자였던 야즈게르드 2세에 의해 10명의 감독과 (소문에 따르면) 153,000명의 신도들이 학살을 당한다.(388)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 기독교라는 전체 틀에서 보면 이러한 대학살은 순교의 역사로 기록해야 하리라 본다.

이 엄청난 순교 사건 이후 양성론 네스토리우스파는 교육 기관 설립을 통해 교리적 발전을 꾀한다. 그리고 사제(司祭)들을 훈련시키는가 하면 기독교 이전 그리스 철학의 저서들을 기독교 신앙 변증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보존했다.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이들이 성경 중심의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류 지성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도 일어난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기호를 이용해 ‘세베루스’라는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자가 인도인들이 발명한 수학기호체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시리아어가 주요한 교육 매체였으며 이 언어를 통해 의학기술을 발전시켜 왕의 주치의를 양성했으며 이러한 의사들은 이란의 사산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제국의 왕궁 의사로서 주요 역할을 계속해서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파는 6세기경 아라비아반도에서 더욱 교세를 확장하여 자신의 신학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이 교단의 수도원장 ‘다시쇼(Dadisho)’는 자신의 교리적 순수성을 강변하고자 이렇게 선언한다. “(타르수스의) 성 디오도레(Mar Diodore), (몹수에스티아의) 성 테오도레(Mar Theodore), 성 네스토리우스(Mar Nestorius)를 정통교회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우리 공동체가 모르는 사람이다.”(391) 우리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이러한 신앙 노선 천명에서 얼마나 이들이 성경에서 멀어져 있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면을 보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교단을 안정화하는 것이 성경 진리에 토대를 두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교세는 이제 더욱 동방으로 확장한다. 인도와 중국에서 6세기 이후 몇 세기 동안 그 영향력을 미친다. 예수님의 사도 도마가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인도 교회에서 6세기 초 네스토리우스 양성론은 융성했으며 이는 스리랑카까지 교세를 확장한다. 인도에 뿌리내린 양성론은 서구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서유럽 로마 가톨릭의 침략자들이 몰려온 16세기까지 그 교세를 안정되게 유지한다.(393) 그런데 신학적으로 보면 양성론 중심의 동방교회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맥클로흐는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시리아 전통의 수도사들은 (……) 인간 가치에 대한 기독교의 신뢰의 다양성에서 낙관적인 위치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면 인성은 선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모든 인성은 나중에 타락했을지라도 선하게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394)

그런데 이러한 인간론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분타락론은 적어도 서방의 교부 아우구스투스가 전적 타락을 주장할 때까지 지배적 신학이었다. 이렇게 5-6세기 동방신학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 사역의 절대성을 따르는 교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속주라는 의미보다 (양성론자이든 단성론자이든 상관없이) 인류가 본받아야 할 도덕적 모범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분타락의 양성론은 7세기 중엽 중국 당나라에 전파되었다. ‘경교(景敎)’로 알려졌고 당태종이 이를 국교로 정한 후 네스토리우스파는 당시 수도 장안(현재 시안)에 몇 개의 수도원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도원은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고등교육의 중심지로 사랑받았으며 700년 이상 지속했다.(398) 하지만 중국과 아시아에 지속적으로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성경권위에 토대를 둔 올바른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일천 년을 훨씬 넘겨야 했다.



<244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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