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3-10-30 22:0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허물이 없는 배움의 추구


子曰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자왈가아수년 오십이학역 가이무대과의.

『공자가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周易)》을 배우게 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

‘가(加, 더하다)’는 ‘가(假, 빌리다)’가 되어야 하고 ‘오십(五十)’은 ‘졸(卒, 마치다 또는 마침)’이 되어야 한다. 유빙군(劉聘君)이 “원성(元城) 유충정공(劉忠定公)을 만났을 때 자신이 일찍이 다른 논어본을 읽었을 때 위와 같이 쓰여 있다”고 말한 것이다. 아마도 가(加)와 가(假)는 음이 서로 가까워 잘못 읽은 것이고, 졸(卒)과 오십(五十)은 글자가 서로 비슷해서 잘못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加」 作假, 「五十」 作卒. 蓋加、假聲相近而誤讀, 卒與五十字相似而誤分也. 가작가, 오십작졸. 대가 가성상근이오역, 졸여오십자상사이오분야). 주자는 이에 대해 『사기』에 있는 “가아수년 약시아어역즉빈빈의(史記作為 「假我數年,若是我於易則彬彬矣」)”, 즉 “자신에게 수년을 빌려주면 이와 같이 나(공자)는 역에 있어서 빈빈(빛남)할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글을 쓸 즈음에는 공자는 이미 70세에 이르렀기 때문에 50이라는 글자는 잘못된 것이 분명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역을 배운다는 것은 길흉과 소장의 이치, 나아감과 물러남, 보존과 패망의 이치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加正作假,而無五十字。蓋是時,孔子年已幾七十矣,五十字誤無疑也。學易,則明乎吉凶消長之理,進退存亡之道. 가정작각 이무오십자. 대시시 공자년이기칠십의. 오십자오무의야. 학역 즉명호길흉소장지리 진퇴존망의도.)
‘큰 허물이 없을 것(無大過)’이라는 말은 대체로 공자 자신이 역의 도리의 무궁함을 깊이 살펴서 이것을 말하여 사람을 가르침으로써 그것이 배울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가르쳐주려는 것이었다.(可以無大過。蓋聖人深見易道之無窮,而言此教人,使知其不可不學,而又不可以易而學也. 가이무대과. 개성인심견역조지무궁, 이언차교인, 사지기불가불학 이우불가이역이학야.)
공자는 배움을 평생의 일로 삼은 사람이었다. 그가 70세가 되어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좇아 살아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는다(七十 從心所欲而不踰矩, 『논어』 「위정」)”고 했던 것도 그의 배움의 경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는 자신에게 몇 년만 더 주어진다면 역을 배워서 크게 잘못되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가 고백한 70세 때의 배움의 경지와 이 본문의 말을 비교하면 본문의 말은 ‘종심소욕이불유구’의 경지에 아직 미치지 못했을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가 역을 배우려 했던 이유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역(易)’은 『역경(易經)』이라고도 하고 『주역(周易)』이라고도 한다. 역경에는 6개의 효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괘와 전체로는 64괘가 있는데 이를 활용하여 점을 쳐서(괘를 만들어서) 세상만사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한다. 점괘를 가지고 장차 누군가의 길함이나 흉함, 보존됨과 패망함, 가고 옴 등을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사서삼경이나 모든 유학 경전의 배움의 마지막이 그래서 역경이 된다. 즉 공자가 역(경)을 배우려 했던 것은 세상의 이치를 보다 더 잘 이해해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역이 점을 치는 책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지금 본문에서는 그가 누군가의 앞으로의 일을 알려주어서 무얼 해보기 위한 의도에서 역을 공부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는 역경이 점을 치는 책이긴 하지만 결코 남의 운명이나 하늘의 정한 이치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줄이고 남에게도 자신의 허물로 인해 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스도인의 배움은 어떠해야 하는가. 왜 성경을 읽고 익히고 따르며 또한 실천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만의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런 배움은 곤란하다. 배움을 가지고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곤란하다. 그리스도인의 배움은 자기의 참 실존의 존재를 알고 남에게 동일한 실존의 실상을 알리는 데 있다. 하늘의 도를 알아 자기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교하여 그 도에 맞게 살아가려는 데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배움은 각자가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아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교통과 연합을 실현해 내는 것이어야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쉰여섯.기독교 국가로서 칭기즈칸과 초기 몽골 제국
속물이 교양으로 둔갑하는 문화에 대한 니체의 비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