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3-12-12 21:4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예수에 대한 속물적 평전인 슈트라우스의 『예수 평전』


슈트라우스는 초기 몇 세기 동안 기독교가 보여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부정의 욕망과 금욕적 정화의 경향을 달리 설명하지 못하고 오직 앞서 일어난 온갖 종류의 성적 향략과 그로부터 산출된 역겨움과 메스꺼움을 통해서만 설명한다는 것이다.

앞의 인용은 니체가 당대 신학자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가 쓴 『예수 평전』(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을 평가한 내용이다. 이면을 간파하지 못하고 표면만 할퀴는 슈트라우스의 비평에 근본 한계가 있다는 점을 니체가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현대 성경 비평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슈트라우스의 앞의 저서는 세간의 평가로는 당시에 혁신적이었다. 예수에 관해 개혁파 교회가 유지했던 신학적 해석을 거부하고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 여부를 다시 제시했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는 먼저 복음서에 나타난 기적을 비롯한 초자연적 사건을 조작된 신화나 상징적 이야기로 간주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본성이 신성이신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일 뿐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규정하는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인간이다.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 식민지 갈릴리 지역의 목수의 아들이었던 인물이다. 제2성전 시대 후기 유대교의 종말론이 팽배하던 때에 태어난 예수는 세례 요한이 처형당한 후 종말론적 예언자이며 탁월한 윤리 교사로 2-3년간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예수는 놀랍고도 독창적인 비유를 사용해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세상의 종말에 관한 사상을 전파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성전을 더럽히는 환전상과 제물로 쓸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을 쫓아내는 ‘성전정화 사건’을 주도한다. 하지만 이때는 예루살렘에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갈등이 심하게 고조되던 때라 성전 경비병이 그를 체포했고 재판에 회부했다. 그리고 유대 종교권력자들과 헤롯왕은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예수를 넘겼으며 이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하지만 예수의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동생 야고보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예수는 부활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분파들이 점점 모여 초기 기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앞의 설명은 전형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의 주장이다. 슈트라우스도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독교에 대한 혹평을 쏟아내면서 독일 신학계와 지성계의 교양을 높이는 데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슈트라우스의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을 계승한 대표적 신학자가 195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신학자이며 음악가인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이기도 하다. 슈트라우스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조에 나타난 예수는 날조된 신화의 산물이며 진정한 예수 이해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인간 예수와 그의 삶에 주목해야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니체는 자유신학자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평전’에서 예수에 대해 가했던 비판을 일단 일부 공감한다. “예수는 우리 시대에서는 결코 정신 병원을 피할 수 없는 광신자로 묘사될 수 있으며,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세계사적 사기’로 불릴지도 모른다.”(225) 하지만 니체는 슈트라우스의 이러한 예수 비평이 독일인들의 교양 증진을 돕기보다는 더욱 천박하게 할 뿐이라고 혹평한다.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현란하게 쏟아낸다고 진정한 교양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천박한 개념들이 난무하는 잡동사니 더미에 불과한 슈트라우스의 책을 니체는 “속물의 고유한 천성적 비겁함”(226)으로 규정한다.

19세기 독일의 학문적 분위기는 거짓 진리가 마치 개처럼 짖는 ‘개판’이었다. 교양의 깊이라고는 거의 없이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발설하는데 이를 듣고 수용하는 것을 마치 교양인이 된 듯 착각하던 시기다. 이렇게 교양의 저질화와 타락을 선도했던 자가 슈트라우스라고 니체는 혹평했다. 니체는 슈트라우스의 예수에 대한 비판에 나타난 근본 한계를 이렇게 냉정하게 지적한다. “개념은 결코 인간을 더욱 윤리적이고 선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 도덕을 설교하기는 쉽지만 도덕의 기초를 놓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228)이다. 이처럼 니체가 보기에 슈트라우스와 함께 예수 비판에 가세하며 준동하는 속물적 교양인들의 행위는 지적 퇴폐주의자의 광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독일 신학에서 성경권위도 예수의 신성도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오래전 바울 사도는 자신이 말씀을 전했던 빌립보 교회에 비진리가 점점 득세하는 것을 듣고 로마 감옥에서 눈물로 애태우며 편지를 보낸 바 있다. 바른 복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혼탁한 그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애타는 호소의 말씀을 보낸다. ‘신의 죽음’이 유럽을 점령하고 세계 곳곳을 점점 빠르게 잠식하는 우리 시대에도 그 울림이 너무 크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 3:2)



<251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쉰일곱.북아프리카와 콥트 교회, 오직 성경권위로 회복되길
시와 서와 예를 지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