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4-01-16 17: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쉰일곱.북아프리카와 콥트 교회, 오직 성경권위로 회복되길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중세로 이어지는 기독교 전통을 상기할 때 먼저 정통 사상을 고수하고자 했다고 평가받는 주요 교부들이 떠오른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약 155년-240년경), 키푸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200년?-258년) 그리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년-430년 8월 28일) 등 북아프리카의 교부들이다. 이들의 전통은 이후 비록 그 지역에서 점점 사라지지만 로마 제국의 언어 라틴어 전통을 고수하면서 면면히 이어진다. 이러한 기독교 전통은 690년대 이슬람의 침략을 견디면서 향후 5세기 동안 서방 라틴 교회의 전통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12세기 이슬람의 무자비한 알모하드(Almohad) 왕조가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고 이슬람 사립주의를 내세워 잔혹하게 탄압하여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 침략 왕조는 기타 이슬람 세력과 다르게 이슬람의 단일성(Tawhid)을 특히 강조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모두에게 이슬람교도와는 달리 막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각 종파의 종교문화적 행위들을 억압했으며 서적이나 문화적 자산들을 파괴했다. 이러한 극심한 탄압으로 북아프리카 초기 기독교의 정통 신앙들은 점점 소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북아프리카 교회들의 소멸 역사와는 달리 카이로 근방 콥트 정교회(영어: Copts)는 이슬람의 보호를 받으면서 이후 그 전통을 유지한다. 콥트 교회는 마태복음 2장 14-15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본문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피신한 곳이 애굽 곧 이집트라는 기록 때문이다. 호세아 11장 1절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성취된 곳이 바로 콥트어를 사용하는 이집트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이사야 19장 19절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현장이 바로 콥트 교회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콥트 교회는 단성론을 지지했기 때문에 이슬람 군주들은 양성론을 옹호하는 동로마제국과 달리 관용을 베풀었다.(432) 그리고 로마 가톨릭도 콥트 정교회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몽골 제국은 네스토리우스파를 두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콥트 교회는 몽골 제국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콥트 교회는 당시 모든 종파의 탄압 대상이었다.


이슬람의 콥트 교회 탄압은 1354년 집단 학살에서 비극의 정점을 찍는다.(433) 당시 이슬람의 술탄 알-애시라지 알-말리크 알-아시르 알-살레히(Al-Ashraf Al-Malik Al-Aziz Al-Salih)가 에지프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통치자는 콥트 교회를 비롯해 여타 비이슬람 집단에 대한 학살자로 유명하다. 1354년 이 술탄은 콥트 교회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명령했으며 콥트교 신도들의 살해는 물론 지역 콥트 교회의 모든 시설물을 파괴했다. 이 대학살의 참사 이후 종교개혁의 시간이 다가올 무렵 한때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피렌체공의회’에서 그리스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연합을 설파한 바 있다. 이 무렵 콥트 교회도 서방교회 곧 로마 가톨릭과 연합에 합의한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교의 준수나 교세 확장을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433)


본래 콥트 교회의 전통은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도원 중심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소박함과 겸손이라는 정교회의 원리를 특히 준수했다. 5세기 말에는 이집트 사막 곳곳에 수백 개의 수도원과 은신처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수도원이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세기 무함마드 알리 왕조가 추진한 사회 안정과 관용 정책에 따라 개선되기 시작했다. 콥트 공동체는 독립된 행정 단위가 되었고 비이슬람 국가에 부과되는 지즈야 세금을 면제받았다. 현재 콥트교 총대주교는 다른 기독교 교파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집트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때는 그 자리를 콥트교회 총대주교에게 부탁할 정도다. 2001년에는 콥트 정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청은 상호 세례성사를 인정하여 상대방 교파로 이적할 시 재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합의하였다. 즉 중요한 교리에서 서로 통합한 현대 기독교 역사의 주요한 사례가 된다고 본다. 양측 젊은이들은 얼마든지 함께 혼인할 수 있으며 어느 쪽 한쪽의 승인을 받으면 종교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성경은 본래 콥트 문자를 사용했으나 이집트의 급속한 아랍화가 진행됨에 따라 교회에서 아랍어 사용은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성경강론은 아예 완전히 아랍어로 하고 있다. 현재 콥트 교회 신자는 약 2천만 명 정도이며 그중 이집트에 1천5백만 명에서 1천8백만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 2017년에 정부 뉴스 알 아흐람은 이집트 내 콥트 정교회 신자 비율을 10-15%로 추산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독일 등 디아스포라 콥트 교도가 존재하는데, 약 2백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콥트 교회의 특징은 박해의 역사라는 점이다. 다른 어떤 기독교인들보다 더 많은 탄압을 받고 있다. 특히 콥트교를 믿는 여성과 소녀들이 당하는 납치와 실종 사건이 가장 심각하다.[https://namu.wiki ›콥트 정교회 참조] 콥트 교회에 대한 기도는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다. 현재 다른 종파들과 가장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는 콥트교가 오직 성경진리에 입각한 교회로 회복되고 과거의 무수한 탄압을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치유받는 대회년의 역사가 다가오길 기도한다. 이러한 선교에 누구보다 한국 교회가 오직 순수한 진리의 말씀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길 소원한다.





<252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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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문화에 무감각한 학문의 저질성
예수에 대한 속물적 평전인 슈트라우스의 『예수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