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4-02-28 10:0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쉰여덟. 중세 이후 에티오피아 교회의 슬픔, 비성경적 혼합 종교


중세 말기 로마 가톨릭의 교회 부패가 극성을 부릴 때 1438년부터 1445년까지 피렌체에서 그 가톨릭이 주관하는 공의회(Florence Council)가 개최되었다. 공의회 개최 목적 중 하나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 해결이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이집트 콥트 정교회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기독교 통합을 표방했던 피렌체 공의회는 비잔틴 정교회뿐 아니라 동방의 다른 교회들과도 관계 증진을 모색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결과적으로 통합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으며,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수용하여 점점 그 정체 모를 종교로 전락해 갔다는 것이 슬픈 결과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은 지리상의 대발견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교류를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위협적인 이슬람 세력에 맞서고자 도움의 손길을 찾고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억제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포르투갈은 에티오피아와 동맹을 맺고 군사 지원을 했으며 1541년 이슬람 세력 아드랄 제국과의 전투에 참전해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결과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에티오피아에서 가톨릭 신앙을 전파했으며 교회 간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렇게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서방 가톨릭이든 동방 전통이든 혼합해서 수용한다. 성경 진리에 입각한 기독교가 아니라 그 정체성을 알아볼 수 없는 기형적인 종교로 전락하면서 현대 종교다원주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그 혼돈은 계속 이어진다. 이하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환경에서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성경 진리에서 멀어지는 기독교가 되었는지 약술하면서, 향후 성경 중심의 복음 진리로 바른 기독교 신앙이 회복되길 간구하고자 한다.
10세기경 에티오피아는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지난 250호 참조)의 전통 속에서 수도원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수했다. 수도원은 당시 구디트 여족장의 탄압으로 높은 절벽 꼭대기 같은 곳에 피신하면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고난 속에서 이들의 신앙을 지탱한 것은 정경(政經, kanon)의 절대진리가 아니라 외경(外經, Apokrypha)이나 알렉산드리아 교부였던 키릴로스 전집에서 발췌한 ‘단성론파 교리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고 기괴한 전승(傳承)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에게 내어주고 십자형을 집행한 본디오 빌라도가 회개하고 개종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6월에 본디오 빌라도를 기념하기 위해 축제일을 지정했다. 시편 26편 6절의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라는 구절을 축제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넘겨주고 빌라도는 진심으로 회개하여 예수님이 죽을 때 십자가에 함께 그 죄를 못 박은 자로 추앙한다. 그래서 국가 권력은 교회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그 예로 12세기 말-13세기 초 랄리벨라왕(Gebre Mesqel Lalibela)은 열두 개의 교회를 그 지역에 건립하는데, 취지는 1187년 이슬람 군대에 의해 함락당한 예루살렘을 자기 땅에서 복원한다는 의도였다. 이는 당시 사도전승을 부정당했던 에티오피아 교회의 상황에서 예루살렘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솔로몬왕과 접목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후 에티오피아 교회는 수도원 중심의 교세가 “금욕적 자기부정의 영웅적인 개가를 과시”(436)하면서 교권을 점점 장악하고 국가 권력에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대표적인 수도사가 테클래 헤이마노트(Tekle Haymanot)였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성인 중 한 명으로 추대 받고 있으며 초인간적 헌신과 기적에 관한 전설로 지금도 신앙과 헌신의 상징이 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테클래 헤이마노트는 긴 기도와 명상을 위해 한쪽 다리만으로 29년 동안 서 있었다. 이로 인해 한쪽 다리는 마비되었고, 천사가 나타나 그의 다리를 절단했다는 전설이 이어진다. 그는 여러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데브레 리바노스(Debre Libanos) 수도원은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도 에티오피아 정교회 종교력에 따라 그의 축일(祝日)을 매년 기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극한의 금욕은 “종교적인 지도자에게 무시무시한 권력의 무기”(437)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수도사 중 최초로 교회와 왕국에 간섭하는 궁정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권력의 중심부가 되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는 13세기부터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일부다처제/일부일처제’ 논쟁이다. 교회는 신약성경에 근거를 두고 일부다처제를 금했지만 군주들은 아프리카 전통을 운운하며 여러 아내를 두었다. 군주들은 일부다처제 비난을 잠재우고자 수도원에 땅과 재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에 교회 권력은 일부다처제를 허락하되 교회에서 결혼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다처제를 유지하는 동안은 성만찬에서도 배제했다. 그러나 성만찬에서는 배제 당했지만 이를 만회하고자 종교적 금욕은 더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이러한 절충과 혼합의 전통은 신약의 주일과 유대교 안식을 혼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438-39쪽 참조) 가령 14세기 ‘에우스타테우스(Ewostatewos)의 집’으로 불리는 수도원 단체는 수도원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면서 기독교 전통의 엄격한 실천을 강조하고 동시에 율법주의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도 준수했다. 에우스타테우스의 가르침은 당시 에티오피아 사회와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 전통을 오늘날까지 고수하는 수도원과 신자들이 있다.
그 후 에티오피아의 콘스탄티누스라고 불리는 ‘자라 야콥(Zara Yaqob, 1434-68년 재위)’이라는 황제가 있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통치 기간 동안 정치와 종교의 안정 및 문화적 번영을 이룩했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를 구현했으며 종교 개혁가로서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순수성과 교리의 통일성을 강화했다. 이단과의 싸움에도 앞장섰으며 종교 통합을 위한 여러 종교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교육과 문학 발전 및 활발한 외교 정책으로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며 스스로 자신의 철학과 종교적 신념을 반영한 저작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마리아의 기적』이라는 대중적 예배서를 만들었으며 이를 사제들을 위한 예배 필독서로 삼았고, 이마에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고 쓴 문신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나는 악마를 거부한다’ 그리고 왼손에는 ‘나는 마리아의 신하’라는 문신을 손에 새기며 마리아 숭배가 에티오피아 교회를 장악하게 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의 공존, 유대교 전통과 마리아 숭배의 혼용, 안식일과 주일의 혼합 등 에티오피아 교회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현대판 종교다원주의의 집산지로 전락했다. 자라 야콥 황제의 종교와 정치에 대한 성공적 통치 곧 15세기 에티오피아 제국의 “가장 번성하고 자기 확신의 시기 가운데 정점”(441)은 곧 기독교의 정체성이 사라진 혼합종교의 극치로 치달았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종교 혼합은 황제를 정신세계의 혼돈으로 몰아가 과도한 편집증에 사로잡혀 유대교를 위험 세력으로 간주하고 타종교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으며 신앙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도 태형으로 죽인다.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제대로 접하지 못한 에티오피아 기독교 전통은 무려 7백 년 이상 혼돈의 혼돈을 거듭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성경 진리에 기초한 종교적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온몸으로 감지할 수 있다. 눈에 보기에는 한쪽 다리로 29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삶은 참으로 숭고해 보인다. 하지만 극단의 금욕적 행위 자체와 바른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행위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비성경적 전통이 더욱 가슴 아프다.

22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2-23)
<254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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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아홉. 로마 제국의 ‘우연한’ 조직 개편 로마 가톨릭 세력화의 기반으로
모순의 문화에 무감각한 학문의 저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