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1-10-30 20: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하나님의 죽음에서 ‘성경의 죽음’으로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기독교 중심의 서양 사상의 모든 개념들을 뿌리째 뽑아버린 자’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사상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가치를 창조하여 삶 에 규범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사상의 형성과정을 언어 놀이에 불과하다고 본다. 언어 놀이의 특징은 불변의 의미를 허락하지 않는 가변성에 있다. 따라서 어떤 불변의 고정된 의미를 언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면 처음부터 규칙 위반이 된다.

  언어 놀이의 또 다른 특징은 작동되는 원리가 마치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논리와 같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의도가 분명히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대전제는 언어가 감춰진 세계의 본질로 이끄는 진입로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그에게 성경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거짓말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놀이는 가족에 비유된다. 가족의 특징은 그 구성원들이 서로 닮았지만 모두 공유해야 하는 공통된 모습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가족일 수 있다는 합의의 가능성만을 남겨준다. 그 가족이 함께 참여해 만든 규칙에 따라 가족이 형성된다. 이른바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이쯤에서 생긴다.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라고 한다.

  이 개념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에는 언어가 갖는 고유한 기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어떤 불변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언어라는 주장은 부정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가 휴가를 떠나면 수수께끼가 발생한다”고 말할 때, 이제까지 언어는 강제로 추방당했으며 그 사이에 수수께끼와 같은 것들이 마치 진리처럼 행세했다는 것이다. 멀리 강제로 휴가 떠났던 언어의 가족들은 이제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거주자의 맥락에 따라 그때마다 필요한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만약 한글의 ‘두어 개’, ‘서너 개’ 혹은 ‘네댓 개’라는 개념들이 일상 언어의 소통을 얼마나 절묘하게 만들어내는 줄 알았다면 자신의 가족유사성 이론을 더 확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개념들은 대상과 언어의 정확한 일치가 진리라는 전통적인 서양 철학의 진리론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성경의 경우처럼) 언어란 초월적 존재의 본질을 담는 도구적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은 더 강하게 부정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후기 주저인 󰡔철학적 탐구󰡕의 핵심을 이룬다. 언어는 세계에 관한 불변의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구별된 그릇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언어를 언어답게 제대로 사용하려면 우선 언어가 짊어지도록 했던 초월적 가치나 형이상학적 요구를 없애야 한다. 이 맥락에서 언어를 단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만 사용하려는 기독교는 가장 먼저 없애야할 대상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은 언어로 인해 우리 지성이 미혹되는 것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고 말할 때, 그의 상대는 우선 기독교 특히 성령 감동에 의한 계시 기록으로서 성경일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까지 서양은 병 속에 갇힌 파리였다. 하나님, 구원, 자유, 영혼불멸의 의미 등은 언어를 억압하여 우리를 죄수로 만든 망령들이다. 미혹 당한 지성을 해방시키는 일은 성경의 권위를 전면에서 부정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니체에 의한 신의 죽음이 선언된 이후 한 세기를 훨씬 넘어서 이제 ‘성경의 죽음’으로 서양 기독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함부로 말해온 기독교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양 기독교에 대한 서양인들의 자기부정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가치도 이제 그들로부터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방증(傍證)하는 사건이다.

<다음 호에는 ‘침묵과 과장(誇張)의 중용(中庸)’을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헛소리’와 침묵 사이의 방황
‘철학의 종말’로서 분석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