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2-07-22 23:4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의 죽음에서 성경 권위 해체로 !


“지식이란 결국 해석의 허구일 뿐이다.” 현대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의 말이다. 해석의 필수 조건이 텍스트라면, 지식은 텍스트에 담긴 의미를 찾아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 지식은 적어도 ‘진리’로 향한다는 전제를 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지식이란 사실의 진리가 아닌 조작된 허구라고 지적한다.

  지식의 허구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식을 전달해 주는 매개물인 텍스트의 신뢰성도 붕괴시킨다는 사실에 심각함이 더하여진다. 구조주의자로서 바르트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태도를 부정한다. 그래서 사물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인간일 수 없다. 인간 특히 서양인들이 권위를 부여했던 모든 지식들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허구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 (신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듯이) 만물을 지배하겠다는 태도도 비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정황에서는 사실과 진리라고 목청을 돋우는 만큼 허구조작의 심각함만 더할 뿐이다. 여기서 불변의 가치를 보증할 수 있는 ‘한 권’의 텍스트, 그 한 권의 텍스트에 대한 하나의 정확한 해석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정황을 상기시키면서 바르트는 텍스트 해석의 무제한성을 강조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의 객관적 이념이 존재하며 그것을 담고 있는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말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객관적 존재에 대한 확신을 표방하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탐구도 더 큰 허구조작의 요구일 뿐이다. 모순을 피하고 확고한 논증 체계를 확증하기 위한 텍스트 창작의 열정은 ‘화형대’ 설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만 높일 뿐이다. 따라서 텍스트는 보편적 가치로는 창작할 수 없으며 해석의 해석을 반복하는 허구로만 남아야 한다.

  바르트가 텍스트 해석의 무제한성과 텍스트의 허구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창작의 자유로운 행위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해석의 무한성은 노동과 놀이의 경계를 없애고 창작의 기쁨을 보장한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하나의 예술적 가치로 환원시켜 폐쇄된 의미 통일체로 여기고자 하는 시도들을 차단하고자 한다. 텍스트에 대해 “위치가 바뀌는 흔적들의 더미”라고 말할 때, 바르트는 시공을 초월한 해석의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해석만 반복될 뿐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기존의 예술형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아방가르드적 텍스트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의 기원은 니체다. 니체에게 텍스트에 대한 열망과 즐거움은 오직 창작 자체의 기쁨에서 찾아야 한다. 그 이상의 의미 부여와 체계화는 허구조작 정도를 심화할 뿐이다. 창작의 기쁨이 텍스트를 만들어야 한다면, 독서도 ‘하나’의 의미를 찾고자 읽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니체의 의도를 바르트는 이렇게 표현한다. “독서란 구조의 붕괴를 야기시키는 영원한 출혈(l’hémorrage permaneta)이다.” 다시 말해 독서는 화석화(化石化)된 의미로 고착화된 체계를 붕괴시키는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하며 동시에 이러한 붕괴 과정은 큰 희생의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해체와 파괴로서 독서의 ‘아픔’없이는 창작의 기쁨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해석의 개방성과 독서의 무제한성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니체가 선언한 바 있는 절대 가치로서 신의 죽음과 직결된다. 니체가 볼 때 신적 계시를 담고 있는 텍스트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니체는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떼지어 움직이는 은유와 환유 그리고 의인적 표현들이다.” 니체에게 진리라든지 보편적 가치라든지 하는 말들은 속고 속이는 수사학적 미사여구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폭로하는 것이 훌륭한 창작이며 예술이다.

  베르너 하마허는 '독서의 알레고리'에서 니체의 의도를 이렇게 전한다. “비유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비유는 참이자 거짓이다.” 남은 과제는 ‘니체처럼 자유롭게’ 신이 죽은 자리를 대신해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느냐이다.

  성경을 통일된 하나의 진리 체계로 보려는 시도는 이 시대와는 결코 조화할 수 없는 주제다. 그래서 보화 중의 최고다. 의미를 찾지 말라고 일갈하는 시대에서 에스라를 통한 성경 교육의 강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느 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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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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