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2-09-29 19:4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서양 존재론의 역사: 죄악(罪惡)의 역사 !


인간의 사유는 자아(自我)에 대한 자각을 본질로 한다. 생각한다는 사실은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무한 긍정의 원천을 찾고자 하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무한한 긍정의 원천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불변성과 동일성을 뜻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유는 곧 절대성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존재는 다른 어떤 것에 의거하지 않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이 동일성이다”라고 지적하는 부분에도, 자기 동일성은 곧 자기 존재의 원인을 자신으로 본다는 근본 가설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구체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신과 근본 가설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존재(자체) 사이의 괴리에 불안해하지 않는 이유도 불변의 동일한 존재가 있다는 환상 덕분(?)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어야 한다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무한 요구는 사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이러한 자기 동일성에 대한 요구가 ‘악’(惡)의 원천이라고 한다. 동족(同族) 유태인의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실제로 겪은 레비나스는 악을 단지 ‘선의 결핍’이라고 보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구조로 존재하는 것이 악이다. 일반적으로 악이란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기쁨을 쌓으려는 욕구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기 동일성을 삶의 근본 조건이자 사유의 원천으로 삶으려는 시도에 이미 담겨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비나스는 서양의 존재론을 애초부터 ‘사악한 존재론’으로 본다. 자기 원인을 목표로 삼는 모든 사유, 그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초월적인 세계를 가상하는 모든 시도, 나아가 타인과 관계 맺음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모든 행위들이 바로 악한 성질을 띤다.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태도에는 선한 존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사악한 욕심을 가려주는 위장막과 같은 것이 바로 ‘선의 결핍으로서 악’이라는 개념이다.

  자기 자신을 사유의 주체로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악의 원천은 ‘자기만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의지 자체를 선한 본성으로 미화(美化)한 사유의 역사가 서양의 존재론이다. 이러한 점에서 레비나스에게 ‘구원’은 분명하다. 앞서 말한 악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를 ‘탈출’이라고 한다.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가 하는 말이다. “탈출은 그 자신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필요이다. 즉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모면할 수 없는 관계를 부수는 것,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필요이다.”

  이러한 지적을 따라가 보면 자기 동일성에 대한 확신이 크면 클수록 사악성은 더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기 동일성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초월성으로 몰입하면 할수록 자기 동일성은 곧 타자에 대한 사악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선의 결핍인 악을 극복하고 선을 회복하라는 지금까지의 윤리적 명령은 자신에게 낯선 것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만행을 자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묵인하고 조장해온 포악함이었다. 

  현재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기 삶의 결정적 동력으로 존재하는 타자(타인)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묵살하며, 나아가 세계의 저편에는 선의 결핍을 보상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독살의 기운이 서린 이기주의를 구속의 역사라고 속여 온 역사가 서양의 존재론 중심의 사상이었으며 종교였다. 이들은 도래할 낙원을 위한 ‘구원의 역사’가 아니라 ‘지옥의 역사’를 조장해 왔던 것이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관계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려는 레비나스의 심리적이며 현상학적인 분석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는 않다. 더불어 이쯤에서 우리는 인간 근본에 드러워진 불가피하다 못해 저주로 덮힌 상황을 철저하게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관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의 첫 만남에서 하와에게 찬사를 보냈던 아담의 고백은 이내 하와뿐 아니라 창조주에게 탓을 할 수밖에 없는 이 모순과 사악성을 더 철저하게 사유해야만 할 것이다.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말했다(창 2:23).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하고 물으시니 아담이 대답하기를 “주께서 저와 함께 하도록 주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어서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창 3:11-12).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악(惡)한 존재’의 극복, 현대사상의 또 다른 허구
레비나스의 절규-우선 타인(他人)부터 돌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