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종교 폐지를 주장하고 자기가 상상한 교회를 제언하는 바르트
§ 17. 종교의 지양으로서 하나님의 계시(Gottes Offenbarung als Aufhebung der Religion)
(KD I/2, 304-396, 신준호 한글 번역 GG: I/2, 350-447, CD., 280-361)
Gottes Offenbarung in der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ist die richtende, aber auch versöhnende Gegenwart Gottes in der Welt menschlicher Religion, das heißt in dem Bereich der Versuche des Menschen. sich vor einem eigensinnig und eigenmächtig entworfenen Bilde Gottes selber zu rechtfertigen und zu heiligen. Die Kirche ist insofern die Stätte der wahren Religion, als sie durch Gnade von Gnade lebt.
§ 17 THE REVELATION OF GOD AS THE ABOLITION OF RELIGION
The revelation of God in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is the judging but also reconciling presence of God in the world of human religion, that is, in the realm of man's attempts to justify and to sanctify himself before a capricious and arbitrary picture of God. The Church is the locus of true religion, so far as through grace it lives by grace.
성령의 부어짐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적 종교의 세계 안에 다시 말하여 자기가 고안하고 자기 힘으로 설계한 하나님의 형상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하고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려고 추구하는 인간적 영역 안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서, 그러나 또한 화해하시면서 현재하시는 것이다. 교회는 은혜를 통하여 은혜로부터 살아가는 한에서 참된 종교의 장소이다(신준호).
§ 17 종교의 폐기(Aufhebung)로서의 하나님의 계시(KD., I/2, 304쪽)
성령의 부어주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적인 종교의 세계 속에, 더 자세히 말하면 완고하고 독단적으로 제안된 하나님상(象, Bilde)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합법화(rechtfertigen)하고 거룩하게(heiligen) 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Versuche)의 영역 속에, 심판하시는 그러나 또한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있다. 따라서 교회(Kirche)는 은혜로부터(von Gnade) 은혜로 말미암아(durch Gnade) 생존(lebt)한다는 점에서, 참다운 종교의 장소(Stätte)이다(김재진 번역).
바르트는 § 15에서 “계시의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 16에서 “계시의 비밀, 성령으로 발생하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했다. 많은 바르트 연구자들은 바르트의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바르트 신학의 중심은 “신의 자유와 인간의 선택”이라고 제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한 인간으로서 최고의 탁월성을 보인 위인이지만, 참하나님이나 참사람은 아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과 참사람으로 제시하지만, 451년 칼케돈 신경을 재해석하여 자기 체계로 다르게 진술하는 자기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A.D 1-30년 동안 생존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한 인간일 뿐이다.
‘Gegenwart’는 presence, 현재, 현존 등으로 번역되었다. 다른 의미로는 출석, 현시점, 마주 보고 있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바르트 사상에서 ‘마주 섬’은 중요한 개념이다. 바르트는 하나님 안 자기 운동에 따른 하나님 자체 내의 ‘마주 섬’(Gegenüber, 교회교의학 Ⅲ/1, 204-205)으로 형상을 이해한다.
은혜(Gnade, grace)란 무엇일까? ‘은혜(恩惠)’라 하기도 하고, ‘은총(恩寵)’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는 바르트가 정의하는 은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은혜를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free gift)”로 정의하는데, 신학적 의미가 함의되어야 한다. 즉 “값없이 제공되는 선물”이 “무엇(what)”인지를 밝혀야 한다. 밝히지 않는다면 명료한 학자가 아니다. 송용원은 “바르트는 신학의 목적을 은혜를 통하여 인간의 조건과 한계를 존재론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고 제시했다. 송용원은 “성령은 존재론적 선물의 중재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존을 통한 존재론적 선물 자체”로 제시했다. 즉 은혜를 성령으로 등치시킨 것이며, 은혜의 선물이 공동체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송용원의 분석은 바르트에 대한 합당한 분석이라 생각한다. 성령이 중재자 혹은 구속자(Redeemer)라는 것은 바르트가 자주 사용하는 핵심 어휘이다. 필자는 그러한 바르트의 개념에 대해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통신학에서 구속주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중보자(Mediator)도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 2:5).
송용원의 분석이라면 바르트는 “성령과 은혜”를 동등 개념으로 교차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사람의 종교”와 “은혜의 교회”를 구분한다. 바르트가 표현한 사람의 종교는 “바리새적”이라는 의미를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르트가 말한 사람의 종교의 범주에 정통 기독교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Aufhebung를 김재진은 ‘폐지’, 신준호는 ‘지양’으로 번역했는데, 폐지(ABOLITION)가 합당한 번역으로 보인다. 바르트는 “인간에 의해서 고안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문장은 틀리지 않는데, 그 대상이 정통 기독교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성령을 은혜로 중재자로 구속자로 세우는 새로운 교회를 출범시켰다. 그래서 성령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한 절대 체계를 구축시켰다.
바르트의 구도대로라면 주일예배 설교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게 된다. 성령의 부어짐에 따라서 언제든지 장소 불문하고 은혜가 임해지며 계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꿈꾸는 교회의 믿음 체계이다. 그러나 정통 교회는 정해진 날과 장소, 주일날 합당한 예배당에서, 합법적인 설교자가 선포한 복음을 통해서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구도이다. 규범적 이해와 실제적 현상은 같지 않다. 신학은 실제가 아니라 규범적 이해를 추구한다. 규범적 이해에서 균형을 잡고 가능 범위를 선택하면 된다. 규범적 이해 없이 모든 것에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은 위험하다. 바르트는 기독교 교리를 인간이 창안한 것이기 때문에 철폐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정통 교리를 절대불변의 진리체계로 수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교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1초라도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바르트는 허상, 임시적 가치로 교회가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는 처음부터 유일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 믿음 체계를 전환시키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될 수 없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아닌 “자기 교회 신앙”으로 전환시켰다. 우리는 교회는 변함없이 거룩한 공교회의 정통 교리를 지키며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제언하기 때문에, 바르트 개인의 주장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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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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