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역전의 명수, 바르트
바르트는 믿음(Glaube)에 대해서 진술한다(GG., 45-46). 우리는 바르트를 읽기 위해서는 자기 신학 개념, 신학 어휘 개념을 명확하게 세워야 한다고 제언한다. 용어 개념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바르트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바르트의 개념에 동의하는 것과 개념이 없다면 바르트의 소용돌이에 있는 것이고, 명확한 자기 개념이 있다면 바르트의 소용돌이를 바라보고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일단 바르트는 믿음을 인간의 특수한 의향이나 행위의 산물이 아니라고 설정했다(GG., 45). 그리고 믿음을 신이 인간에게로 신의 은혜로운 다가옴으로 규정하며, “인간의 행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인격적 현존(die freie personliche Gegenwart Jesu Christi im Handeln des Menschen)”으로 제시했다(GG., 45). 그렇다면 독자 제위는 믿음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있는가? 믿음(Faith)에 대한 정의는 잉글랜드 청교도들에게서 방대함이 드러난다. 청교도들은 믿음을 세 가지 요소 지식(Notitia), 동의(Assensus), 신뢰(Fiducia)로 구체화시켰고, 개혁파에서도 동일했다. 서철원 박사는 이러한 믿음 개념이 스콜라적이라고 비판했다. 서 박사는 믿음의 개념보다 믿음을 고백(주 예수님,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하는 훈련으로 진행했다. 즉 믿음의 개념보다, 믿음의 주님을 고백할 것을 제언한 것이다. 바르트는 믿음을 신이 인간에게 은혜롭게 다가오는 것, 인간의 행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한 인격적 현존, 즉 두 방향으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믿음을 인간이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간의 믿음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바르트의 개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아름답지만, 정통 신앙이 아니다. 정통 신앙에서는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지위(Status)를 밝히려고 했다(고대 신학). 그런데 종교개혁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Officia)을 밝히는 지향성이 있었다.
바르트의 신학에 들음(Horen)이 있는 것은 종교개혁 신학의 요소를 반복한 것이다. ‘들음’이 있어야 순종할 수 있는 구도이기 때문에 들음은 순종을 위한 필연성이 된다. 바르트가 들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경건주의의 행동주의와 자유주의의 합리주의를 극복한 개혁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들음은 ‘하늘의 음성(immlischen Stimme)’이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바로 다음에 ‘들음’에 대해서 참된 들음, 참된 순종으로 연결해서(GG., 45) 불가지론으로 들어간다. 부정신학, 신비주의의 불가지론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추종자를 미로, 어둠에 가두는 광명한 천사이다. 개혁신학은 부정신학의 ‘심연’이나 신비주의의 ‘안개’에 빠지지 않는다. 믿음의 주를 힘써 고백하며 증언하기를 시도하며 노력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교적 진술의 올바른 내용을 인식하는 것”과 그것이 아닌 “쓸데없는 사색”으로 나뉜다고 분류시켰다. 그런데 바르트의 포괄성에 쓸데없는 사색은 일어나지 않는다. 합동 교단에서 결정한 여성강도사 관련 헌법 개정의 건은 신비주의적 불가지론의 도전에 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하나님께서 여성목사를 안수하시길 원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답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 가는 길에 올무를 놓아 스스로 잡힌 후에 그 올무를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바르트가 교리를 진술의 올바른 내용을 인식하는 것으로 규정했는데, 그 올바름의 수준은 인간적이지 않아서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평가를 중지해야 하고, 전능한 하나님에 집중하도록 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교적 진술의 내용을 인식하는 것과 행동을 인식하는 두 조건에서 보다 근원적인 아픔이 있었다면 유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르트는 46쪽에서 49쪽까지 상당한 분량을 제시한다. 바르트의 본문에 큰 글자와 작은 글자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작은 글자에서는 학자들이 등장해서 논의가 전개된다. Anselm of Canterbury(1033–1109), Bonaventure(1217–1274), Thomas Aquinas(1225–1274), Martin Luther(1483–1546), Philip Melanchthon(1497–1560), Johann Gerhard(1582-1637), August Hermann Francke(1663–1727), Friedrich Schleiermacher(1768–1834), Adolf von Harnack(1851–1930), Georg Wobbermin(1869–1943), Søren Kierkegaard(1813–1855) 그리고 바르트 당대의 학자로 Karl Heim(1874–1958)이 등장한다.
바르트는 안셀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는 안셀름에서 신학자의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GG., 46). 안셀름은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의 관계를 설정했다. 바르트는 두 스콜라 철학자 안셀름과 보나벤투라로 시작하는데, 지식, 믿음, 신비주의, 부정신학으로 전개했다. 부정신학의 불가지론은 인간이 하나님을 규정한다는 명제를 세워 부정하면서 진행한다. 바르트는 믿음, 지식에서 양심과 습관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바르트는 습관(habitus)으로 신학함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 부분에서 “거듭나지 않는 자들의 신학(theologia irregenitorum)”에 대해서 지적했다(GG., 47).
그리고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에서 하르낙, 칼 하임 등으로 진행한다. 즉 안셀름에서 칼 바르트까지 신학적 계통성을 제시한 것이다. 바르트의 특징은 모든 신학자들의 문장을 자기 사유 체계에 적합하도록 배치시킨 것이다. 바르트의 탁월한 신학적 사유와 정보는 그의 독창성을 의심하게 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르트의 방대한 자료들이 종교개혁신학에서 이탈하는 새로운 신학 구도라고 제안한다. 즉 정통신앙의 계보는 1세기 교회에서 존 칼빈까지 구도화시키고, 존 칼빈 이후의 개혁교회에서 칼 바르트는 철학과 제종교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구도를 창안해서 소개했다.
바르트는 초기 『로마서 강해』(2판, 1922년)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자신의 “영적 스승”으로 고백할 만큼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질적 차이(qualitative difference)를 강조했는데,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 분명하다. 키에르케고르를 루터파 교회 지역인 덴마크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슐라이어마허와 키에르케고르는 사고와 진술의 실존성에 대한 것이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에서 기독교적 종교성(christlicher Religiositat)이 아니라 일반 종교성(Religiositauberhaupt)으로 유지하려고 했다(GG., 47). 그리고 그리스도의 담지자 개념(GG., 48), 그리고 교의학적 노고로 마감한다(GG., 49). 바르트의 사유의 방대함은 코끼리와 같다. 그래서 독자는 코끼리의 한 부분만 만지는 것 같다. 그 한 부분에 감동에서 바르트를 따르지만, 우리는 바르트의 한 부분에서 바르트의 사유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바르트의 전체 내용을 파악한 신학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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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숄츠와 바르트,기독교 신학에서 교회 교의학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