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2-12-20 21:0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령,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 (2)


바르트의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Wirklichkeit), 가능성(Möglichkeit)은 바르트의 계시 개념을 이해하는 데 가까이 간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단일계시적 개념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의 계시 이해를 동심원(concentric circle)적 일원계시(mono or concentric)로 분석하고 있다.

개혁파 교회는 믿음의 대상을 그리스도 예수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한 죄 사함의 구원을 확고하게 세운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믿음의 대상을 계시”로 놓고 있고, 그 계시의 순종(Gehorsam gegen die Offenbarung)을 제시하고 있다(GG., 307). 로마 카톨릭은 믿음의 대상을 “성경에 나타나는 계시의 말씀”으로 규정한다(박도식, 『가톨릭 교리 사전』, 102-103). ※ 천주교는 자기를 가톨릭(Catholic)으로 사용하는데, 필자는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으로 사용한다. 개혁파 교회는 사도신경의 고백, 공교회의 고백을 따라서 자기 교회를 카톨릭(Catholic) 교회로 이해한다. 계시에 순종하는 개념은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새관점학파와 바로 연결된다. 지금 pistis Christou에 대한 논의는 매우 첨예하다. pistis Christou가 목적격(objective genitive)과 소유격(subjective genitive)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faith in Christ(그리스도를 믿음)”과 “faith(faithfulness) of Christ(그리스도의 믿음, 예수의 신실성)”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the faith of Jesus Christ’(롬 3:22: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이다.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에서 πίστεως를 faith와 faithfulness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faith로 번역하는 것은 Luther의 용례를 따른 것으로 분류하고, faithfulness로도 번역이 가능하다고 다른 이해를 개방시키면서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faithfulness로 번역하면 자연스럽게 트렌트 회의의 범주로 들어가게 된다. 최덕성 박사는 김세윤의 신학을 비평하면서 트렌트 회의의 칭의 교령의 패턴에 있음을 지적했다(최덕성,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과 관련하여”, 『역사신학 논총』 30권, 2017년). πίστεως를 faith와 faithfulness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개념에서 심각한 대립 패턴이 형성된다.

우리는 앞에서 황돈형의 “신학의 실천적 진리개념의 가능성을 위한 바르트 계시 이해 :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 개념을 중심으로”를 간략하게 살폈다. 그런데 우리는 바르트의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reality and possibility of revelation)에 대해서, 한 계시(revelation of oneness) 그리고 성령의 현실성, 성령의 사역으로 개념화된 것으로 제시한다(GG., 307). 바르트는 성령의 사역을 인간 전체에 한계 없이 사용하고 있다.

바르트는 인간에게 신의 계시가 수여된다고 규정한다(GG., 307). 이것을 우리는 바르트의 독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성령을 통하여 신에게 대해서 자유롭게 된다고 규정했다(GG., 307). 정통신학에서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죄의 속박에서 풀어질 때에 사용한다. 바르트의 속죄 구도는 정통신학과 다르다. 바르트에게는 죄 사함 없이도 신의 계시가 인간에게 수여될 수 있고,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자유롭게 될 수도 있다. 죄 사함이 없는 구도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기독교의 죄 사함 구도는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절대가치이기 때문에 배타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죄 사함 구도가 없는 기독교 신학은 배타적 기독교가 아닌 모든 종교들과 함께 어울리는 화합의 행위에 불과하다. 메이천 박사는 사도 바울은 배타적 기독교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 복음이 포용적인 포교 행위의 종교들 속에서 생존했으며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바르트는 계시 개념을 그리스도론적 탐구와 같은 확증을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역 안에 있는 성령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성령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대하여 자유로운 상태임을 제시했다. Wir müssen, genau so wie wir es bei der christologischen Untersuchung des Offenbarungsbegriffs getan haben, einsetzen mit der Feststellung: die Wirklichkeit des Heiligen Geistes in seinem Werk am Menschen hat auch eine streng negative Bedeutung(negative meaning). Indem es im Heiligen Geist wirklich(real in the Holy Spirit that we are free for God) ist, daß wir für Gott frei sind, ist schon darüber entschieden, daß wir anders denn im Heiligen Geist nicht für Gott frei sind(KD., 265-266, GG., 307).
바르트에게 계시와 성령(Offenbarung und Heiligen Geist)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성령 안에서 계시 활동에 의해서 현실화(im Heiligen Geist wirklich)되는 것이 현실성(Wirklichkeit)이다. 바르트가 인간 안에 있는 성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negative meaning), 성령 안에 있는 인간이라고 제시한 구도는 신학에서 인간성보다 신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통적인 신학 개념을 완전하게 전환시키는 것이다. 전통적 신학에서 성령의 내주(indwelling of the Holy Spirit)가 있고, 성령의 내주는 십자가 구속과 부활, 승천에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러한 성령의 내주 사상에 대해서 부정적 의미로 평가하면서, “성령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구도를 제시했다.

바르트는 성령을 단일 인격(Einziger: unique person)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성령은 독립된 신성이 아닌 하나님 말씀으로 단일성(einzigen Wort Gottes)이다. 바르트가 성령에게 독립된 신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삼위위격으로 성령의 신성이 아닌 한 신(神)과 연관된 유일성(Einziger)에서 그렇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 성령은 단순하게 교사이고, 말씀이다. 바르트는 교사 없이 말씀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교사에 대한 훈련을 강조했다(Belehren und diese Belehrung das Werk des Heiligen Geistes, GG., 308).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Gottes Wort die Wah-rheit ist, God’s Word is the truth)라고 규정했다(GG., 308). 이러한 명제는 바르트의 독단이다. 바르트의 진리 이해는 가변성이며 진화적 진행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진리의 불변성, 진리대응설을 지지하게 되면 바르트의 명제는 무력화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진리는 성령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사의 입에서 나온 언어행위(言語行為), 화행(話行, Speech act)이다.

바르트는 인간이 아닌 신이 눈과 귀를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GG., 308). 매우 기본적인 주장이지만 명료한 주장은 아니다. 바르트는 성령을 받으면 인간이 영적인 무력감을 인식한다고 제시했다(GG., 308). 성령을 받으면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heißt erkennen, daß wir den Heiligen Geist nicht haben).
바르트는 이러한 상태를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으로 규정하고, 기적(Wunder)이라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사람이 그 현실성 밖에서는 신에 대하여 자유로움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령을 받으면 무력감을 인식하고, 그 현실성에서 신에 대하여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철저하게 자기 무능을 인지해야 하고, 그 기적(현실성)에서 신에 대해서 자유로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두 단계 체계(성령으로 무력감 인지 그리고 현실성에서 신에게 대하여 자유로움의 가능성을 가짐)로 구성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중적 구원체계는 로마교회(세례와 견진례), 오순절주의(세례와 성령충만)인데, 바르트도 유사한 두 단계 체계를 보이고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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