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01-11 19:4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령: 경계 너머에서 당기는 능력, 성령의 부어짐(3)


성령, “신학과 신학에서 성령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대신학에서 결코 생략되지 않은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성령의 사역이 어떤 매개가 없이 주도적인 활동한다는 개념이 현대신학에 있는데, 칼 바르트에게 상당히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과 오순절주의(순복음 계열)가 신학적으로 잘 부합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2단계 구원(영세와 견진례 그리고 세례와 제2성령세례)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 방언을 모두 인정하면서, 방언을 중요한 표징으로 삼는다. 2차 바티칸 공회의를 개최할 때에 개신교에 개방할 때 처음 단계는 오순절주의를 표방했다고 한다. 그리고 급선회해서 종교다원주의적 성향, 칼 바르트적 신학 체계로 선회했다. 오순절주의와 칼 바르트, 로마 카톨릭의 체계는 유사한 면이 많다. 그중 하나는 성령의 주도성이다. 개혁파 신학은 성령과 말씀(per verbum et cum verbo)을 항상 병행해서 견지한다. 성령과 말씀을 분리하지 않는다.

Genau so wie mit der Erkenntnis der objektiven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mit der Erkenntnis Jesu Christi und erst mit ihr darüber entschieden ist, daß Gott ein verborgener Gott ist!(KD., 267, CD., 245).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할 때에 신은 은폐된 신(God is a hidden God)이 현실화된다고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체로 드러난 신을 경험했을 것(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이지만, 다른 인간은 예수가 만난 신은 여전히 감춰진 신에 불과하다.

예수가 신을 만났다면 가능성(Möglichkeit)은 개방된 것이고, 누구도 예수와 동일하게 신을 만날 수 있는 주관적 현실성(Wirklichkeit)이 가능한 것이다. 바르트는 그 일을 성령이 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성령이 신과 인간을 하나 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제시한다. 바르트는 성령이 인간 안에 자기의 성전을 만든다고 제시했다(makes us His Temple, GG., 309). 이러한 표현은 포괄적 표현이기 때문에 검증할 때는 좀 더 엄밀한 잣대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씀했다(고전 3:16). 성령이 무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지, 성령이 성전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성령에게 위로의 직분(Trösteramt)과 심판의 직분(Richteramt)이 있다고 제시했다. 성령은 위로자(Comforter)인데, 심판의 직분까지 부여했다. 그리고 성령을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말씀의 교사(Lehrer des uns mit Gott versöhnenden Wortes)로 이끌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자(Versöhner/Reconciler)이고, 성령은 구속자(Erlöser/Redeemer)라는 바르트의 독특한 신학 구조가 실현되고 있다. 성령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전능한 주님으로, 무한자로 알리는 일을 한다(GG., 309). 정통신학에서 성령은 예수께서 주와 구주이심을 믿게 하며 고백하며 전파하게 한다.

바르트는 인간의 유한성과 신의 무한성의 교차를 제시한다. 유한성이 무한하고, 무한성이 유한하다(denn dieser Gegensatz würde noch nicht unsere Unfreiheit für ihn bedeuten; ist doch das Unendliche des Endlichen so bedürftig wie das Endliche des Unendlichen!, KD., 267).

바르트는 직접적으로 성령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unseren Vater)라고 부르게 한다고 제시했다(GG., 309). 성령은 유한하고 쓸데없는 인간의 눈, 귀, 마음 안으로 신을 이끌어오며, 인간을 취하여 신의 행동의 현실성(die Wirklichkeit des Handelns Gottes) 안으로 이끈다.

칸트 철학은 신이 인식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는 인식론적 불가지론을 선언했는데, 바르트는 그 불가지론적 지혜(agnostische Weltweisheit)를 넘어서는 경계선(die Grenze wirklich)을 제시했다.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통합되는 기적(Wunder)이다. 바르트는 경계를 지우거나 지양한다고 표현하지 않고, 성령이 경계 안으로 gezogen(drawn, 끌어당기다)으로 표현했다. 인간이 스스로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지만, 성령이 끌어당기면 넘어서서 통합(Synthese)이 된다는 구조이다. 바르트의 변증은 성령으로 통합시키는 것인데, 이 통합은 인식(Erkenntnis) 과정에 불과하다.

바르트는 이러한 성령 이해가 없는 것을 아마추어 신학의 산물(das Werk jenes theologischen Dilettantismus, 딜레탕티즘)로 규정했다. 아마추어 신학에는 사변에 빠져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고와 언어가 남발되는 형태가 등장한다고 제시했다. 그러한 신학의 특징을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제시했다(GG., 310). 바르트에게 일관성은 일신론의 행동적 존재이다. 바르트에게 일관된 것은 존재하는 신이 아닌 행동하는 신이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일관성은 탁월하다. 바르트가 비판하는 정통신학에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정통신학이 일관성이 없는 것은 합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합리적 구조로 설득하거나 가르치려는 의도가 없다. 기독교 진리는 계시의 권위, 은혜의 백성에게 성령으로 효과를 끼친다. 그러나 바르트에게는 성령에게 절대성을 두기 때문에 교리적 규범이 의미가 없다.

바르트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간이 신의 안으로 통합될 수 있고, 또 인간 안으로 신이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통합은 현실성(wirkliche)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신과 인간은 “함께 사는 현실성(das wirkliche Zusammensein, the real togetherness of God, 합일된 존재-신준호 번역)”이 된다. 서철원 박사는 바르트에게 신일합일 사상이 있다고 평가했는데, 이 부분에서 등장하고 있다. 칼빈이 제시한 그리스도와 연합은 신일합일 사상과 전혀 관계가 없다. 바르트도 신일합일 사상으로 보지 않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건(event)이라는 면에서 그러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고, 가능성에 의해서 현실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신일합일 사상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바르트는 “함께 사는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 성령을 부정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성령의 사역(Werk des Heiligen Geistes)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신의 계시는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성으로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성령의 현실성(der Wirklichkeit des Heiligen Geistes)이다. 성령의 현실성에서 인간은 신의 길의 현실성(wirklichen Wege Gottes)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수여된다는 것이 인간의 자유 안에서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중략) 오직 성령의 부어짐 안에서 현실적일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오직 성령의 부어짐 안에서 가능하다”(GG., 311). 바르트는 여기서부터 “성령의 부어짐(der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에 대해서 제시한다.

참고로 “성령의 부어짐”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동일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개역개정은 행 2:38을 “성령을 선물로 받음”에서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 번역해서 “성령의 부으심”에 합당하게 번역했다. 그리고 요한일서 2:27에서 “그의 기름 부음”을 “성령의 부음”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많다. 그러나 요한일서의 본문에서는 “그의(주께서) 기름을 부으심”으로 읽어야 한다. 바르트는 성령이 부어짐이 성령의 주권적 사역(구속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름 부음(anointing)은 주께서 부으시는 성령이다. 정통신학에서 성령의 출래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Qul a Patre Filioque procedit).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한국성경연구원)
이메일 : ktyhbg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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