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10-30 22:0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왜 4복음서인가?


4복음서는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다. 비슷하게 보이는 네 권(卷)의 복음서는 혼란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네 권으로 기록된 목적은 분명히 또 확실하게 예수를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분명한 목적을 잡는다면, 더 의미 있게 또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이 시작되는 마태복음은 분량 면에서 누가복음과 비슷하다. 마가복음은 거의 마태복음의 5분의 3이다. 요한복음은 대략적으로 누가복음의 5분의 4이다. 이러한 것은 형식 면에서의 분량이다. 이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며 그 의미다. 이 4복음서는 신약성경의 두 부분에서 전반부를 차지하며 매우 중요하다. 4복음서의 제목에서 “복음”을 간단히 검토해 본다. 마태복음에서 천국 복음을 소개하였다. 마가복음은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언한다.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 있어서 4복음서의 중요성은 참으로 대단하다. 구약성경 전체가 메시아를 언약하고 있다. 그 언약대로 메시아로서 오신 예수께서 직접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왜 비슷하게 보이는 네 권의 복음서가 신약성경의 전반부에 위치하는가? 이 질문을 강조하여 제기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면서, 간단히 분석하여 접근하고자 한다.


1) 이목구비 같은 얼굴을 위하여

먼저 구약성경에서 주의 얼굴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특히 시편에서는 주의 얼굴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히 노래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장하)와 같이 얼굴을 강조하였다. 얼굴은 이와 같이 분명성이나 전체 그리고 확실성 등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4복음서 각각의 주제는 모두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이다. 이러한 공통주제에 의하여 마태복음은 예수의 직임으로 증명하고 있다. 마가는 신분으로, 누가는 사역으로, 요한은 본성으로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각각 증명하고 있다. 4복음서 앞부분은 공통적으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소개하고 증명하셨다. 이 진리 증명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부활의 과정이나 근거에 죽음은 없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의 끈으로 연결되어 왔음을 말한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출생 내용을 묘사하여 밝히고, 마가와 요한은 출생의 서술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셨음을 기술하고 있다. 물론 이것들은 4복음서 각각의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얼굴은 이목구비를 다 담고 있다. 이목구비 네 가지에서 두세 가지를 가리고 보여 주지 않는다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렇게 주의 얼굴을 언약하신 대로 4복음서를 통하여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직임은 귀에, 신분은 눈에, 사역은 입에, 본성은 코에 각각 대비시켜 보았다. 이목구비가 각각 기능이나 의미 등에서 그 특징을 지니듯이, 4복음서도 공통의 주제 하에서 각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2) 팔다리와 같은 연결을 위하여

두 팔과 두 다리는 합하여 사지(四肢)다. 두 다리와 두 팔은 한 몸에 함께 붙어 있다. 분리되거나 절단되면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 사지는 온몸을 의미한다. 이 사지는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연결되어 서로를 위해주고 있다. 이러한 비유는 4복음서의 상호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마태복음이 신약성경의 완성을 위하여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으로도 마가복음이 4복음서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비평학자들의 주장에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4복음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하나의 의미 곧 여호와를 보여주기 위해 각각의 주제를 중심으로 정말 강하고도 아름답게 배열되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각각 마치 두 다리와 두 팔처럼 가깝고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4복음서에서 마태복음은 제일 앞에, 요한복음은 제일 뒤에 위치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다. 이 같은 적재적소가 세상의 그 무엇에 있겠는가! 어찌 두 다리와 두 팔이 따로 활동하겠는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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