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4-06-11 15:1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불신앙으로서 종교(6)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도구 예수 그리스도


Gott in seiner Offenbarung will ja gerade das nicht, daß der Mensch versuche, selbst mit seinem Da-sein fertig zu werden, sich selbst zu rechtfertigen und zu heiligen. Gott in seiner Offenbarung, Gott Jesus Christus ist ja gerade der, der der Welt Sunde trat der alle unsere Sorge(염려, 근심) auf ihn geworfen haben will, weil er fur uns sorgt. (KD., 338)
계시 안에 신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현존재(Da-sein)를 받아들이는 것이나, 스스로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려는(칭의와 성화) 인간의 시도를 원하지 않는다. 계시 안에 신,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졌다. 그는 우리를 위해 염려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염려를 그에게 지우기를 원한다.

God in His revelation will not allow man to try to come to terms with life, to justify and sanctify himself. God in His revelation, God in Jesus Christ is the One who takes on Himself the sin of the world, who wills that all our care should be cast upon Him, because He careth for us(CD., 398)
계시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 곧 스스로 자신의 현존재를 처치하려는, 스스로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려는 인간의 시도를 원치 않으신다. 계시 안에 계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염려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근심을 그분에게 지우시기를 원하시는 그러한 분이시다(GG., 386).

“God in His revelation”, “Gott in seiner Offenbarung”을 “계시 안에 있는 신(하나님)”으로 번역할 때에 좋지 못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있다’라는 동사 때문이다. “계시 안에 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있다’라는 개념은 바르트에게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있음(ist/to be)’과 ‘발생(werden/become)’의 차이가 있다. 바르트는 to be가 아닌 become을 채택한다. 그래서 계시에서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기(is)보다는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become)이다. 그것은 신 존재에서도 동일한 패턴이다. 즉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은 계시 안에서 행동으로 나타난다. 서철원 박사(전 총신대 신대원장)는 바르트(현대신학)에게 신 존재가 없음을 피력했고, 상대편 오영석(전 한신대 총장)은 신 존재가 있다고 주장했다(2018년 “현대신학에 하나님이 있는가”, 국민일보목회자포럼).
서 박사는 “바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대신 하나님, 유일한 신적 존재로 출발한다.”며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는 유일한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하나 곧 최고의 유일한 법적 주체라고 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러므로 바르트는 아버지의 위격과 아들의 위격이 협약을 맺었다는 견해는 수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 삼위 하나님의 첫째와 둘째 위격이 서로 협의하고 서로에 대해서 의무를 지우는 법적 주체라고 제시하는 것은 신화라는 것이다”라며 “발트는 하나님은 삼위가 아니고 한 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피조물과 언약 관계를 세워 인간과 교제하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곧 사람과 사랑의 교제를 가지시려고 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바르트는 세 위격을 주장하는 것은 다신교이고 우상이라는 것”이라며 “하나님은 한 신적 존재이므로 세 위격 혹은 두 위격이 아니라 한 인격적 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위격은 존재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 박사는 특히 “삼위일체 교리를 계시의 삼중 계 혹은 한 하나님의 세 존재방식으로 해석한 바르트의 신학에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바르트는 왜 한 하나님의 삼위일체 계시의 세 계기로 해석하였는가? 바르트의 신학에는 자존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는 행동이고 사건이다. 이 행동 배후로 돌아가서 그 자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계기가 없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존재하시는가? 바르트는 하나님은 아들의 인격 안에 존재하신다고 한다”며 “바르트에게 아들은 인간 예수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존하시는 하나님은 바르트에 없다”고 주장했다.
서 박사는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행동과 사역들에서 존재하신다.”며 “바르트에 의하면 전통적인 신학의 잘못은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존재를 다루지 않고 자존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출발했다는 것”이며 “또한 바르트는 하나님의 신성을 사건과 일치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생명이고 생명의 원천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사건, 행동, 생명으로 이해하면 그의 계시는 특수한 사건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현대신학에 하나님이 없다”VS “있다””, <뉴스파워>, 2018.5.12.).
Gott in seiner Offenbarung를 “계시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번역하면 바르트가 원하지 않은 있음(to be)을 넣어 번역하게 된다. 좀 더 의미가 통한 번역은 “계시 안에서 나타난 신” 혹은 “계시 안에서 활동하는 신”이 좋을 것이다.
바르트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는 척하거나, 의롭게 되거나 성화되는 것을 신이 원하지 않는다는 주장(GG., 386)이 마치 개혁신학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르트에게 있는 강점은 신의 무한한 자유와 사랑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주권과 같지 않다. 절대주권에는 선과 악을 심판하는 공의와 정의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신은 인간과 세상을 향한 제약 없는 사랑과 자유이다.
바르트는 “계시 안의 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바르트의 신 메커니즘이다. 바르트는 § 15에서 예수 안에 신이 활동한 것의 객관성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 신의 활동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 16에서 제시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거부하는 체계가 종교라고 규정하고, § 17에서 지양, 거부, 제거를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통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 2위격 하나님의 인격의 성육신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성육신은 신의 활동성이 인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칼 라아너는 바르트의 성육신을 동일한 다른 표현으로 신의 자기전달(Selbst-Mitteilung Gottes, God's Self-Communication, 존재통보)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졌다고 제시했다. 바르트의 독특한 죄 해결의 구도인데, 필자는 이러한 구도는 구원파적 도식과 유사하다고 평가한다. 구원파는 1세기 골고다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며 아는 것을 추구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이 세상 모든 죄를 짊어졌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했는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이 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 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이 우리를 위해(for us, pro nobis) 염려하며 죄를 짊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죄짐을 짊어진 것이 은혜로운 복음처럼 들리겠지만, 구원은 우리를 위한(pro nobis)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한다. 우리를 위한 복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한 복음이 보인다면 루터의 제언처럼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을 고백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칼빈은 명확한 성경해석을 근거한 복음선포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추구했다. 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랑과 자유 세계에서 무한한 신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말씀사역자의 선포된 믿음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순종하는 삶(계 1:3)이 되어야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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