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8-10-23 19:3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의미심장한 66권의 위치


제목에서 사용한 ‘66권’은 구약성경의 39권과 신약성경의 27권을 합한 것이다. 또 제목에서 사용한 ‘위치’는 구성이나 구조와 매우 밀접하다. 그것은 성경이 지닌 의미가 참으로 길고도 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어 성경을 ‘책 중의 책(The book of books)’으로도 가리킨다. 또 66권이 하나로서의 말씀임을 강조하면서 노래하고 외우기도 한다. 성경 전체로서의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되는 데 유일무이한 구성이며 위치이다. 성경 66권의 구성이나 위치를 따라가 보고 확인하는 것은 성령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성령께서 전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을 감동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이 구성과 위치는 기본적으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다. 두루마리에서 시간적이며 점진적으로 하나의 완벽한 책(冊)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책’이라는 용어를 요한계시록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66권의 명칭에서도 ‘계시록(錄)’은 유일하다.
성경책 66권은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모두 두루마리(책)에서 출발하여 “이 책의 예언의 말씀”으로 완성되어 종결되었다. 이와 관련되어 성경책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여기서는 구약성경이 시간적으로나 위치적으로 먼저이고 그다음이 신약성경이라는 기본을 두고 아주 개괄적으로 몇 가지를 짚어 보고자 한다.


1) 구약성경 39권의 순서

구약성경의 큰 구성이나 순서는 역사서(창~에)와 시가서(욥~아) 그리고 선지서(사~말)이다. 구약성경을 이 점에 기본을 두고 몇 군데를 찾아가 본다. 먼저 창세기로서의 시작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성경의 시작 문구로서 위치하여 순서를 잡아주고 있다. 여기서의 “태초”와 “하나님”과 “천지” 그리고 “창조”는 서로 긴밀하게 밀착되어 도저히 나누어질 수 없다. 태초(太初)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설명될 수 없다. 천지(天地)도 마찬가지이며 창조도 그러하다. 성경 66권의 머리말이면서 시작 문구로서의 이 말씀이 말라기의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까지 두루마리 책으로 묶어지고 엮어졌다. 민수기 뒤에 신명기가 위치하여야 하는 근거와 이유를 확인한다면(박용기, 성경개론 참조) 이것 또한 성령을 욥처럼 보며 확인하는 길이다. 역대기의 마지막 문구와 에스라서의 시작 문구가 형식상 중첩되어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에스라서를 역대기서 뒤에 두지 않고 함부로 이동하여 편집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적힌 저주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전도서 바로 뒤에 아가서가 위치하는 것도 대단하다. 그 주제가 여호와의 영원성과 자비성을 노래하고 있다. 이 찬양을 통하여 메시아를 언약하는데, 선지자와 왕과 그리고 십자가(十字架)의 사랑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바로 12소선지서까지 다가간다. 열두 개의 선지서에서 호세아서가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다. 12소선지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나라의 구성요소는 국민(자손)과 국토와 국권이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회복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1장으로 된 오바댜서가 아모스서 뒤에 있지 않고 다른 위치로 이동된다면 그 얼마나 흐려질까? 요나서 다음의 미가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3권인 학개서와 스가랴서와 말라기서의 순서가 구약성경 전체의 마무리와 신약성경을 연결하려고 준비하는 면에서 의미적으로 참으로 깊고 크지 않는가!


2) 신약성경 27권의 순서

신약성경은 의미적으로 크게 두 부분이다. ‘예수에 의한 성취’와 ‘성령에 의한 성취’(박용기, 성경강론 13권~18권 참조)이다. 이렇게 성경신학을 정리하는데 신약성경 27권의 순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신약성경의 마태복음이 구약성경의 뒤에 바로 붙지 않고 다른 위치로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시작 문구만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기자는 동일한 한 사람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의 뒤와 사도행전의 앞에 요한복음이 바로 위치하고 있다. 누가 감히 이것을 흩어 이리저리 마음대로 붙이고 뗄 수 있는가? 좀 더 나아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명하고 있는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그리고 골로새서를 세밀히 볼 필요가 있다. 빌레몬서와 유다서 등도 참으로 적재적소에 위치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에 있지 않다고 상상해 보라!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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