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1-04-24 21:3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17,運 좋고 나쁜 날 있나?


운이 정말 좋았다거나 재수 좋았다는 말이 상용되어 왔다. 이것은 단순히 표현의 중요성보다 그 내면의 사상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체계가 바로 숙명론(宿命論)이나 정명론(定命論)이다. 이 숙명론의 대표적인 실제가 인명재천(人命在天)이다. 이러한 것들의 핵심은 그 의미에 있다. 인명재천에서의 하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서는 하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 아니다. 이 연재의 글인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15>에서 하늘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부각시켜 놓았다. 이 날보다 저 날이 좋고 이곳보다 그곳이 나쁘다는 식은 우상이다. 일본의 대지진이 있고 세상에 5만 톤급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잠수함처럼 만들어 분양한다고 한다. 이 시대는 노아의 시대와 흡사하다. 자기와 돈을 사랑하다 못해 그것에 노예가 되어 있다. 대개 자기의 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진정한 방주 있나?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인 절대적인 이성(理性)이 있나? 라는 질문이 이 글의 중심이다.

1)말씀의 운동(運動)이 있다.

 존재의 문제는 학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문화에서는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죄에 빠진 몸들이 모여 있는 타락된 집단의 문화이다. 이러한 어두운 세상에 참 빛이 있나?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방주가 있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성경만은 잠잠히 있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하고 있다. 이 단 마디가 운명론이나 숙명론에 대한 강한 검이다.

①보이지 않는 성령의 검(劍)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 분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고 확증하고 있다. 창조주의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령께서 세상을 지배하며 섭리하였다. 수면 위에 운해한다는 것은 그 수면 을 지배하며 운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여 성령과 통한다.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것은 수면 위에 운동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에 운동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에 빠진 이 시대의 문화는 노아의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기의 주관이 각각 커져가는 이 거센 세파에 진정한 소망의 방주가 어디에 있나? 이러한 세태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창설하고 교회를 진리로 양육시켜 무자하여 투쟁케 하고 있다. 이 성령의 검만이 이 세파를 헤치고 승리의 날까지 가게 한다. 자기의 주관대로 좋은 날로 또는 나쁜 날로 단정하지 않는다. 운동하는 말씀에 의하여 주 안에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의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하는 절대적인 이성(理性)이다. 이 이성이 인간의 영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바로 인간의 영혼을 분석할 수 있다. 

②영과 육과 마음에 임(臨)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이 운동력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해 낸다.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하는 것의 핵심은 임하는 것이다. 그 임함의 중심은 위에서 나열된 대로 모든 인간들의 영과 육과 마음을 분석하고 분별하며 감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모세에게 임하였고 모세에게 임한 영을 모세와 함께한 장로들에게도 임하게 하셨다. 그 이전에 여호와의 말씀은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도 임하였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은 그의 영과 육과 마음에 찾아와 함께하여 언약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그 섭리의 결과로 이삭까지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 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에게도 임하였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구체적인 선지자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증언이 증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언약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성령이 강림한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신께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신다. 인간이 살며 기동한다는 것은 영과 육과 마음이 있어 활동한다는 의미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2)날(日) 잡은 주관자 있다

날 잡는 것은 택일(擇日)이다. 보통 사람들이 마음대로 날을 잡고 정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숙명론이나 운명론과도 모순이 된다. 이처럼 어쩌면 근거와 논리와 의미 없이 한 날 한 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경은 창세기 1장의 창조 내용에서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를 선포한다. 물론 지금의 하루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은 모든 시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것은 모든 시간과 공간은 항상 인간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고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신다(전2:26).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영 중심의 마음과 육 중심의 마음을 주신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선(善)이고 싫어하심이 악(惡)이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인 이성이다. 인간은 상대적인 이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각자 자기에게 좋고 나쁜 날이 있다고 생각한다.

①모든 것에 기한이 있다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이러한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모든 날을 잡고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을 한 손에 쥐고 있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시는 만군의 여호와는 전능하시며 거룩하시다. 그 전능하신 분이 이것과 저것 모두를 계획하시고 이루신다. 그 거룩하신 분께서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각각 의롭다 악하다고 하신다. 이러한 만군의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인간은 날(때) 자체에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날에게 포로가 되어 운이 좋은 날이나 운이 나쁜 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태어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다. 태어나는 것도 인간 스스로 나온 자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만이 인간의 태(胎)를 열고 닫는다. 태어났다가 얼마 되지 않아 죽는 이도 있다. 이런 일에 대한 해석을 무슨 근거에 의해서 할 수 있을까? 성경은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고 못 박아 선언한다.
       
②낮과 밤이 기운을 전하다

낮과 밤은 천기를 지니고 있어 때마다 그것의 기운을 지니고 나타내고 있다. 그 기운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 속에는 우주를 움직이는 운기(運氣)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수면에 운행하시기 때문에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될 수 있다.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운명론이나 숙명론의 핵심이다. 시편 19편에도 자연(自然)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시편19편의 온전한 해석은 신구약성경의 주제에 기초하여 논리를 따라 갈 때 온전히 풀이된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는 것이다. 낮과 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계시의 중요한 수단이다. 이 내용은 앞의 창세기 1장으로부터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온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주께서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신다(시65:8).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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