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3-05-26 16:2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 12 장 그리스도의 성육신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분이 (중략) 사람의 구원을 좌우하는 하늘의 작정(作定: decree)에서 나온 것이다. 지극히 자비하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최선의 것을 작정하셨다.

그의 사명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게로 회복시켜서 사람의 자녀들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었고, 게헨나(지옥)의 상속자들을 천국의 상속자들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으므로 순종으로 그것을 시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키고 죄에 대하여 형벌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참 사람으로 오셔서 아담의 인격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순종을 이루시며, 우리의 육체를 대표하셔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만족시키시는 값으로 내어놓으시고, 그 육체로서 우리가 치러야 할 형벌을 값으로 치르신 것이다. (중략) 우리가 그리스도와 공통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의 교제의 보증이며, 그가 우리의 육체로 옷 입으시고 죽음과 죄를 함께 정복하셔서 우리가 승리와 개선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받으신 그 육체를 희생 제물로 드리셨고,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곧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사실을 주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인류의 불행을 치유하시기를 뜻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가 되사 만물을 통일되게 하셨다고 선포하고 있으니(엡1:10, 참조22), 구속의 사명을 부여받지 않은 또 다른 머리를 인정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본문 中
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570~582.

지금까지 논증한 칼빈의 이론을 정리하면, 첫째 단원에서는(1장~5장), 인간(아담)은 자기의 의지에 따른 결정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죄의 책임을 본인이 감당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둘째 단원에서는(6장~11장), 타락한 인간에게는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타락한 인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 도덕적이며 의식적인 율법이 주어졌다고 말했으며, 그리스도는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구속주로 계시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신구약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의 동질성과 약속과 성취의 차이점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의 신빙성을 확고히 했다.
  이번 단원부터는(12장~17장),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정체성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칼빈의 이론체계는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속사를 원리(타락-죄-구속)로 한 기반위에서,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구속주가 계시된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속의 목적을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칼빈은 본장에서 하나님이신(logos)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중보자의 사역에 대한 난해한 반론들을 반박하는 형식으로 개진하고 있다. 먼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대해서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근거는 “사람의 구원을 좌우하는 하늘의 작정(作定: decree)에서 나온 것이다. 지극히 자비하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최선의 것을 작정”하신 것이라고 밝힌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직접적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게로 회복시켜서 사람의 자녀들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었고, 게헨나(지옥)의 상속자들을 천국의 상속자들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사람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으므로 순종으로 그것을 시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키고 죄에 대하여 형벌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근본적인 목적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그리스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근거와 이유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논할 때 하나님의 작정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칼빈은 ‘작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로서 그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작정을 중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계시의 근간이 되고, 만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되어진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는 섭리의 일관성을 규명한다는 차원에서 대단한 의의가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작정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사실을 주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인류의 불행을 치유하시기를 뜻하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모두가 창세전부터 확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작정계획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하지 않으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귀착되게 되며,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섭리의 주체로 변모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떠한 원칙도 없이 그때그때 발생한 사건을 수습하는 해결사이거나, 즉흥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임기응변에 능한 분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만사를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음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섭리의 주체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작정론의 요지는 만사가 하나님의 계획(뜻)에 기초한 것이 때문에 모든 섭리를 하나님의 계획에 근거해서 인식해야 된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작정(계획, 뜻)은 피조세계의 섭리사역을 주도하는 근간이기 때문에 선악간의 모든 일에 일률적인 적용과 일관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작정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서 악한 일이나 사탄의 역사 또는 인간의 범죄에 관한 것은 침묵하거나 아니면 사탄과 인간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단정하는 사례가 있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발상으로 하나님께는 선과 악이 일반인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여겨진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악간의 일도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인간의 형질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고, 사탄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작정을 무시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을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보조자로 전락시킨다. 그들의 신학은 엄밀히 말하면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다. 즉, 인본주의 신학의 특징은 섭리의 주체가 인간이며, 하나님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보조자로서 인간이 요청할 때 나타나서 도와주는 조력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덕적인 신으로 자리매김 되거나, 사회정의구현을 위한 혁명적인 투사가 되기도 하고, 소외계층을 위해서 박애정신을 발휘하는 사랑의 화신(火神)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작정과 절대주권을 이해하지 못한 신학의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의 범주를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궁극적인 목적까지 왜곡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작정과 절대주권이란 용어는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위에서 서술한바 칼빈의 작정론은 신학의 시발점으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집필자도 그 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정론으로 출발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목적이 편협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유일한 목적이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속의 죽음으로 만족시키셨다고 말한다. 물론 칼빈의 주장이 원칙에서 빗나간 것은 아니다. 칼빈의 말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증거하는 문구가 셀 수 없이 많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의 비중도 세상과 인간의 회복과 구속에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작정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단순히 구속사역에만 편중해선 곤란하다. 하나님의 작정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정리한다는 것은 먼저 성육신에 대한 근거와 원리가 제시되어져야 하며, 그 기조(基調)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근거는 창세전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작정계획(뜻)에 기초한 것이 된다. 그리고 원리는 하나님의 작정계획을 알게 하시기 위한 자기 계시로서 ‘언약과 성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세계에서 세우신 작정계획을 피조세계에 드러내시기 위하여 첫 아담을 창조하시고 3대 언약을 세우셨다. 이것은 바울의 말대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롬5:14)으로서 성육신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며, 그 내용 역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롬1:2)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세우신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근본적인 목적은 창세전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성취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기 위한 근본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적인 목적으로서,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시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을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해서 이해해야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려는 계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
  칼빈은 작정론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오시안더(Osiander: 1498-1522)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첫째, 오시안더는 “혹시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임하셨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솔하다”라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가 되사 만물을 통일되게 하셨다고 선포하고 있으니(엡1:10, 참조22), 구속의 사명을 부여받지 않은 또 다른 머리를 인정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바울의 말은 이용하여 반박했다.
  다시 말하면, 오시안더는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왔다고 주장하고,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계획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시안더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하나님의 작정 계획의 범주에 포함시켰으나, 아담의 타락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로 간주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범주에 예속시키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정리해야 될 부분은 아담의 타락 사건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구속만 하나님의 작정범주에 예속시키고,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작정 밖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오시안더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과 관계없이 오실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면, 아담의 타락과 하나님의 작정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타락 전(前)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정립이 요구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쟁점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예정하기 전에 선택을 먼저 계획하셨다는 전택설(前擇說)과 아담의 타락을 예정하신 후에 선택을 계획하셨다는 후택설(後擇說)의 근간이 된다. 이 부분은 3권의 예정론에서 자세히 취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오시안더의 반론과 그에 대한 칼빈의 반박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계획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된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나 피조세계의 생명체 모두는 하나님의 작정계획에 기초해서 존재하고 섭리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그 어떤 상황이나 사건도 예외일 수는 없으며, 만약 그런 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하거나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절대성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칼빈의 반론은 바울의 말을 인용한 점에서 타당성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의 작정임을 균형있게 논증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도 작정론에 입각해서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논조보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언약했기 때문에 오셨다는 표현법이 좀 더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것이 될 것이다. 작정론은 성경의 논리대로 아담의 타락보다(창3:) 하나님의 언약이(창1:28) 선행되기 때문에 성경의 체계와 원리에 의해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으며 타당한 것이다. 성경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계획에 근거해서 아담과의 언약(창1:28)과 그리스도의 성취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과 신학적 논증은 인간의 타락과 구속이라는 도식 보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성취라는 구조에 의해서 논의되는 것이 보다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것임을 재인식해야 한다.
  둘째,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요, 이는 아버지께서 메시아를 사람의 육체로 옷 입히시도록 이미 작정하셨으므로 사람이 그 메시아를 닮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오시안더는 “만일 아담이 그의 본래의 의로운 상태에서 타락한 일이 없었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사람이 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오시안더의 주장은 아담의 형상이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점은 메시아를 사람의 육체로 덧입혀서 성육신하게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과 무관하게 그리스도는 오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본성을 취하여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반박한다.
  오시안더의 주장은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이다. 이 점에 대한 오시안더의 견해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형상을 모델로 취한 것이며, 메시아에게 사람의 육체로 옷 입히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오시안더는 ‘형상(image)’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 형상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외형적인 모양이나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박용기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형상에 대한 의미를 “바울은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형상이 있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실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상’하면, 단순하게 어떤 크기(size)나 모형(type)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만 에베소 4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크기나 모형이 아니고 내면세계에 관한 것으로 사도 바울은 묘사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는데,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의 모습, 이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e)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과 같은 내면적이고 신령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외형적인 크기나 모형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라고 밝힌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를 뜻하는 것인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인가이다. 이 점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을 취하여 하나님의 생기를 공급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에 의해서 생존하게 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체요 주관자이시며, 인간은 객체요 종속적인 관계에 있음을 확고부동하게 밝혀주려는데 있다.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라는 문구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즉,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권세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모든 만사와 만물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한 것에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하시려는데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목적과 직결된다. 인간의 존재목적은 솔로몬의 증거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전12:13)라는 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오시안더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있다는 것은 과도한 상상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되는 이유는 간접적으로는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함이고,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데 있고, 근본적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있는 것이다.
  둘째, 아담의 타락과 무관하게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다는 것이다. 오시안더의 추론의 문제점은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결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하신바와 같이 영원하신 작정계획에 근거한 것이며, 영원하신 언약을 성취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계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아담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기 위한 과정이고, 그 과정 역시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과 무관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작정의 범주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판단된다. 오시안더의 주장이나 칼빈의 반박에서의 핵심적인 사안은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오시안더와 같이 여러 가지 신학적인 문제들을 상상하거나 추론하게 되고, 그에 따른 불합리한 신학이론이 파생되게 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제 13 장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제2권 제 11 장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