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3-06-20 20:5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 16 장 그리스도의 기능(技能)


예수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혹은 우연히, 혹은 사람의 결정에 따라서 된 일이 아니라, 최고의 작정의 선포자인 천사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이루어진 일이었다(눅1:28~33). 그리고 그 이름이 주어진 이유가 제시되었다. 곧,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것이다(마1:21; 눅1:31). (중략) 구속자의 직분이 그에게 맡겨져서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화목하시기까지 우리와 원수이셨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이 되는가를 잠시 살펴보아야겠다. (중략)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영원한 죽음이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가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잘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구원의 축복을 별로 값있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불의가 우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고 정죄를 받는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연합시킬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충만하고도 견고하게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받아 주신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근거를 두었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어떻게 해서 죄를 제거 하셨고, (중략) 그의 복종의 전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이루셨다. (중략)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로부터, 그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중략)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르기까지를 - 완전한 구원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 단번에 가장 적절한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그 저주에 굴복시키신다는 뜻이었다. (중략) 스스로 죄에 대한 저주를 지고 가는 속죄 염소와도 같다는 사실을 시사하고자 하신 것이다. 모세의 희생 제사법에 상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 바로 상징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아샴’으로서, 즉 선지자의 말처럼 죄에 대한 대속의 제물로서(사53:10) - 우리의 오점과 형벌이 그 위에 전가되는 그런 제물로서 - 드리신 것이다.

우리를 얽매였던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과, 또한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벧전3:19)라는 구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이 있는 림보(limbus)에 내려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해방하셨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감옥 속에 집어넣는다는 논리 자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해방시키러 그리로 내려가신단 말인가? (중략) 베드로서에 있는 구절도 이런 의미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망대 - 혹은 보통 번역하는 대로 ‘옥’- 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3:19). 전후의 문맥을 볼 때 우리는 이 구절을, 그 이전에 죽은 신자들이 우리와 함께 동일한 은혜를 나누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게 된다.
본문Ibid. pp. 617~646.
 中
 칼빈은 앞의 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삼직을 구속사역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본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서의 기능을 어떻게 수행하셨는지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자의 기능을 인지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믿음의 토대를 굳게 세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한 필수요건이며, 궁극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시켜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속죄사역의 기원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이미 확고한 것임을 피력한다. 또한 구속자의 기능을 행하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사도신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음부에 내려가심,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체계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첫째, 칼빈은 구속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동기에 대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혹은 우연히, 혹은 사람의 결정에 따라서 된 일이 아니라, 최고의 작정의 선포자인 천사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이루어진 일”Ibid. p. 617.
이라고 밝힌다. 즉, 그리스도께서 구속주로 사역하신 동기는 인간의 요청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그가 맡겨주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칼빈이 구속주의 사역의 근간을 하나님의 작정계획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단순히 기능적인 면에서만 제시하기 보다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밝히려는데 있다. 그 원인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구원의 주체가 그리스도에게서 교황으로 이관(移管)되었으므로, 교황의 무오설(無誤說)이 만연되어있었으며 그 권세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의 핵심은 모든 면이 하나님의 작정계획으로부터 출발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개진된다는데 있다. 이러한 신학정신은 그의 사상의 본류이며 종교개혁의 초석이기에 이 부분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둘째, 칼빈은 구속주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영원한 죽음이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가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잘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구원의 축복을 별로 값있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Ibid. p. 619.
이라고 말한다. 칼빈의 주장은 보편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유인즉, 은혜에 대한 감동은 자기의 처지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아는 만큼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의 진가를 아는 것은 구속 이전과 이후의 상태를 면밀히 비교함으로서 배가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깨달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연합시킬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충만하고도 견고하게 연합할 수 있다”Ibid. p. 621.
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화해작업은 그의 구속사역으로 완성되며,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될 때 사역의 진가를 깨닫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해를 위한 구속사역은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받아 주신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근거를 두었다.”Ibid. p. 621.
라고 진술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극찬을 한다.
  칼빈의 논조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사랑의 기원이 창세전부터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통해서만 은혜의 농도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창세 전(前)이라는 시점을 근거로 확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어 그와 결합되어져야만 엄청난 은혜에 감동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칼빈의 논지는 확고부동한 그리스도 중심이며, 창세전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사역의 토대를 견고히 할 뿐만 아니라 구속사역의 범위를 시간세계에서 영원세계로 확장하는데 주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의 논조는 창세전의 구속에 대한 예정과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사역이라는 구속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의 주장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구속사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확립해 주었으면 한다. 기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구속을 본질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출발점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설명하지만 그것이 일관된 원리로 작용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범주에서 취급되고 있다. 그 결과 ‘계시’계시(啓示, revelation)란 말은 신이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써 ‘자기를 현시하다(apokalypsis)’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사역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어 알게 하시는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정을 이룬다.
는 신학의 한 부분이며, 하나의 주제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속을 목표로 하는 ‘구속사’는 기독교신학의 표지(標識)가 되어 항상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기현상은 하나님의 존재확증이라는 계시의 목적을 간과한 양상으로서, 인간의 구속을 위한 구속주의 사역방법에만 치중한 결과이다. 흔히들 그리스도를 계시의 절정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계시의 절정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고히 하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언약을 총체적으로 완전하게 성취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 총체적이며, 포괄적으로 수립되어 있으며, 신약성경은 구약의 언약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성취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로서, 그의 사역이 구속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직임(마태)과 신분(마가) 그리고 사역(누가)과 본성(요한)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의 구속만을 위해서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언약하신 내용전체를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의 행적과 교훈 그리고 표적을 시행하시는 중요한 시점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마21:4)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마13:14) 또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13:18)는 단서를 붙인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최후를 맞이할 때도 “다 이루었다 ”(요19:30)라는 말을 통해서 그의 죽음이 구약의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에 대해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완전케’는 헬라어 플레로오(plhrovw)이고, 충분한에서 유래했으며 채우다, 충만하다.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다’라는 의미가 문맥상으로 적합하다.
 하려 함”(마5:17)이라는 말로써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구약성경의 용도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에 있으며, 신약성경의 기록목적은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요20:39)이라고 밝힌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며,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에  의한 성취내용으로서 그리스도 자체를 증거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사역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용어의 의미는, 직임과 관련해서는 선지직, 왕직, 제사장직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으로 증거되어야 하고, 신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되어야 하고, 사역에서는 대속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서 확증되어야하며, 본성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신 것으로써 종합적인 증명이 되어야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에 대해서, 단편적인 구속사적 범주를 넘어서서 총제적, 체계적,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본질적이며 계시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약성경의 주제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명제가 분명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구속을 거론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이며 절대적으로 수립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과학적인 원리에서 보더라도 타당한 것처럼, 창세전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에서(logos)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작정을 영원히 성취하기 위해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세우신 것이며(엡1:3~4), 이 언약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기 위하여 아담을 창조하시고 즉시 3대 언약(창1:28)을 수립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세운 언약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에 대한 증거적인 차원에서 아브라함과 동일한 언약을 수립하신다(창12:, 17:). 이 언약은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 이스라엘 역사의 근간이 된다.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해서 성립되며 진행되는데, 이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체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예수 자신이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사실을 입체적으로 증거한 것이며,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보혜사 성령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면,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원리는 언약과 성취이며, 그 언약과 성취를 이루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이고, 언약과 성취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성경의 중심인물은 그리스도이심이 명백하게 부각되며,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서 절정이라 할 수 있다.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경의 원리와 구도가 확립되어져야만 계시를 목적으로 한 그리스도의 사역 목적이 명료해 지며, 성경을 인간의 구속에만 편중시켜 집착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자의 기능을 행하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그의 죽음, 매장, 음부에 내려가심,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으로 증거한다. 그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진술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역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의 복종의 전 과정을 통해서”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 622.
라고 말하며, 그 시점에 대해서는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로부터, 그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Ibid. p. 622.
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르기까지를 -완전한 구원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단번에 가장 적절한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Ibid. p. 623..
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으며,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빌 2:7~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보충하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의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정리하였는데 그의 구속사역은 죽음에서 재림까지를 포괄하는 구원의 점진성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은 윤리적인 복종이나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차원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순종을 언약성취사적 맥락에서 정리하지 못하면, 부모의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인륜도덕적인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구속사역을 완수하기 위한 단순한 의미로만 설명하는 부분이 아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그의 시도는 매우 고무적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의 범주에 대해서 전 생애를 통틀어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칼빈의 아쉬운 점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실제로 설명할 때도 그의 잉태로부터 시작해서 재림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쳐 균등하게 배분하여 설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다.
  칼빈은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서는 “스스로 죄에 대한 저주를 지고 가는 속죄 염소와도 같다는 사실을 시사하고자 하신 것이다. 모세의 희생 제사법에 상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 바로 상징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아샴’으로서, 즉 선지자의 말처럼 죄에 대한 대속의 제물로서(사53:10) -우리의 오점과 형벌이 그 위에 전가되는 그런 제물로서- 드리신 것”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 626.
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능과 그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는 “우리를 얽매였던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과, 또한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일이 바로 그것”Ibid. pp. 628-629.
이라고 밝힌다.
  칼빈은 위의 주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에 대해서는 죄를 전가 받으시고 대속하시는 제물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이 맞다 치더라도,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건의 의미만을 설명하기 보다는 성경의 구성 체계를 통해서 원리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약에서 증거된 대로 짐승제물에게 죄를 전가하여 그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얻은 구약백성들에 대한 내용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전가 받으시고 자기 백성들의 죄과를 담당하심으로서 구속하실 것에 대한 내용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성경의 전체적인 체계에서 보면, 구약에서는 율법의 규례대로 제물에게 죄를 전가하여 대속했으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죄를 전가시켜 대속한다. 여기에서 죄를 전가시켜 대속하는 사역은 구약의 모형적인 사건을 그리스도께서 실체적으로 성취하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이 말은 인간의 죄를 전가 받아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의 구속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의미가 있음을 뜻한다. 그 의미는 직접적인 면에서 볼 때, 타락한 인간의 죄를 구속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께서 구약의 모형적인 언약을 실체적으로 성취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에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대속사역이 성취됨으로써 하나님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능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성도의 자세는 육체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 역시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면, 타락한 인간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게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자세로 살아가게 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속성을(시가서) 찬양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찬양하는 성도의 생활을 뜻하는 것이다.
  칼빈은 해석상의 오류를 유발하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벧전3:19)라는 구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이 있는 림보(limbus)에 내려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해방하셨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감옥 속에 집어넣는다는 논리 자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해방시키러 그리로 내려가신단 말인가?”Ibid. p. 630.
라는 말로써 반문하면서,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그 이전에 죽은 신자들이 우리와 함께 동일한 은혜를 나누게 되었다는 뜻”Ibid. p. 631.
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림보라는 감옥의 장소(場所)성을 배격하면서, 도리어 옥에 있는 영들은 오래전에 죽은 신자들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주장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는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연옥설(림보)을 염두에 두고, 연옥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옥에 있는 영들을 신자로 규정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오래전에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이다. 우선 원어적으로 보면, ‘영’은 헬라어 호스(o{")인데, 이것, 이 사람, 저것, 저 사람을 가리키는 기본 대명사로서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고 ‘옥’은 헬라어 퓔라케(fulakh)인데, 감시, 경계, 감옥을 뜻하며 죄수들을 가두는 장소로서 감옥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벧전3:19)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있는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다. 물론 음부라고 해서 어떤 장소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음부’는 헬라어 하데스(a{/dh")인데, 죽은 자의 거처를 가리키고 있으나,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거처(장소)로 표기되는 것이지,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거쳐 라는 공간개념 보다는 상태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유인즉, 영원한 세계는 공간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말은, 카톨릭이 주장하는 연옥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다 죽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칼빈은 림보의 존재를 반박하는 데서는 타당성이 있었으나, 옥에 있는 불신자를 신자로 규정하는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어 보인다. 성경은 분명히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벤전3:19)라고 말하고 있다. 옥에 있는 영들은 불택자들로서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한 자들을 가리킨다.벧전 3:19~20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신 것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사역을 통해서 심판의 범위를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복음전파는 구원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빙거도 된다.빌 1: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사역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영원한 사역일 뿐만 아니라 선택 받은 자나 유기된 모든 자들에게까지 확대되는 보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단편적인 기능만 생각하지만 도리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심판의 기능도 알아야 한다.
  칼빈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기능을 사도신경에 기초해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최종적으로 강림하실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사도신경의 체계를 따라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시며, 최후의 심판주로 오셔서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심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초두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주권사상은 너무도 명백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주로서의 기능에 대한 설명도 한 치의 오차가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약과 성취라는 성경의 원리와 하나님의 계시를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의도에 입각해서 정리하지 못한 점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제 17 장 그리스도의 공로(功勞)
제 15 장 그리스도의 삼직(三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