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3-06-20 20:5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 17 장 그리스도의 공로(功勞)


그리스도의 공로를 논의 할 때에 (중략) 최초의 원인이 되는 바 하나님의 결정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신의 선한 기뻐하심으로 그를 중보자로 지명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을 얻으시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공로를 이루신 것은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고 또한 그의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범죄를 제거하시도록 먼저 지명되셨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원인 혹은 근본으로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둘째 부수적인 원인으로서 이를 뒤 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진정 공로를 이루셨고 우리를 위하여 성부께 은혜를 얻어 주신 것이다.
본문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520~526.
 중
칼빈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논증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역하신 것이라고 밝힌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공로를 획득하게 된 기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신의 선한 기뻐하심으로 그를 중보자로 지명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을 얻으시도록 하신 것”Ibid. p. 648.
이라고 밝힌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의 공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초한다는 의미로서, 그리스도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기원을 창세전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부터 시작함으로서 철저한 하나님의 작정(예정)론 자임을 보여준다. 그의 신학적인 체계는 하나님 중심논리의 근간이 분명하고, 서술과정이 일관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나타난 현상 자체를 분석하기 이전에 원인과 기원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근원으로부터 과정과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단순사역이나 자기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에 기초하여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공로를 취하신 방법에 대해서는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고 또한 그의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범죄를 제거하시도록 먼저 지명되셨기 때문”Ibid. p. 648.
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원인 혹은 근본으로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둘째 부수적인 원인”Ibid. pp. 648~649.
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근간이 하나님의 선한 뜻에 있었음을 강조했고, 사역의 내용 보다는 하나님의 지명이 우선했음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구속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바울의 말대로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을 수행하실 분으로 지명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자들을 사랑하신 결과라고 말함으로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그리스도의 공로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게 되었다”Ibid. p. 650.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진정 공로를 이루셨고 우리를 위하여 성부께 은혜를 얻어 주신 것”Ibid. p. 650.
임을 밝힌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공로를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은혜이며, 철저한 순종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해서 주어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증거했으며, 루터 역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고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인되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칼빈의 논조에서 철저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 그리고 은혜만을 선포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精髓)를 확인할 수 있다.
  넷째,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성격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새로이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강림하실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공로는 우리로 하여금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뒤에 그의 높아지심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Ibid. p. 655.
이라고 증거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공로를 취하신 것은 무슨 명예나 영광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자기를 낮추시면서 까지 온전히 헌신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은 성도들에게 윤리실천의 표본이 되신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칼빈이 진술한 그리스도의 공로는 창세전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뜻)에 근거해서 출발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자로 그리스도를 지명하셨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값없이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어졌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위한 헌신이었음을 증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칼빈 신학의 핵심은 완벽한 신본주의에 있으며, 하나님의 예정에 근간을 둔 절대주권신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신학적인 논리체계는 구성상에 있어서도 치밀하고, 전개상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그는 신학의 출발을 하나님의 작정(예정)에서 시작함으로서 이론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으며, 내용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있어서도 구속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개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석의 원리 부재로 인해서 모든 것이 구속사에 편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논리대로 모든 섭리의 근간을 영원세계에서 구성된 하나님의 작정(예정)에서 시작했으면, 시간세계에서의 출발도 작정에 기초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언약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작정, 뜻, 계획에 기초한 것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창세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작정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신 언약엡 1:3~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은 창조를 통해서 3대 언약으로 명시되며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그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로 규정된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언약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성취로 구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의 원리를 확보해야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계시를 목적으로 기록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의 기록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게 하려는데 있으며,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상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통해서 증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방법상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신학사상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언약을 성취하는 영광계시의 원리 보다 인간을 구속하는 방법론에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인간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성취를 통한 그리스도 증거 자체에 있다. 인간의 구속은 언약을 성취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사역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함으로써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이심을 통해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존재를 계시하는데 있다. 언약과 성취는 여호와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원리로 채택되었으며, 그 원리를 이루는 방법의 주체가 그리스도인 것이다. 언약과 성취의 원리를 실행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복음서를 통해서 총제적으로 증거된다. 사복음서는 성경의 원리에 입각해서 구약의 언약을 근거로 채택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름부음 받은 직임(마)과 낮아지고 높아지는 변화의 신분(막)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구속주의 사역(눅)과 하나님과 동등된 신성(神性)으로 본성(요)을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에 관한 약속을 종합적이며 입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로 오셨고,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었으며,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고, 애굽으로 피난하였다가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복음서는 그의 잉태-출생-피난-성장-죽음-부활-승천-우좌-재림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기록한 것이며, 이러한 내용은 구약성경에 언약되어 있으며, 전 생애를 통한 그의 행적은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보면, 타락한 인간의 구속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다양한 내용 가운데 하나의 장르이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포함된 것으로서 인간의 구속을 통한 그리스도의 증거에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속사신학은 그리스도 사역의 정수(精髓)를 타락한 인간의 구속에 맞추어 개진함으로써 모든 사건을 인간의 구속에 편입해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전개되는 구속사신학은 모든 관심이 인간의 구속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만 편중되게 된다. 따라서 구속사 신학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신학이 되며,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역이 전면에 부각됨으로서 인간이 섭리의 주체로 오인될 수 있다.
  본인은 칼빈 신학의 핵심인 하나님의 영광과 절대주권을 오도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빈은 섭리의 근간을 하나님의 작정에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과 주권을 증거하기 위한 신학적인 입장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율법을 통한 정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어지는 신학논리는 칼빈의 신본주의적인 의도와 신학사상을 왜곡되게 이해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끝맺는 말

  칼빈의 기독교강요 2권을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본 결과, 그의 개혁성향과 신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논리 정연한 신학체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칼빈의 논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작정(예정)에 기초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본권에서는 교리적으로 민감한 부분들이 열거되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인 입장도 선명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타락과 의지에 대한 문제와 율법의 폐기와 적극적인 수호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상관성에 대해서 선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신학적인 입장을 확인해 본 결과 몇 가지 의문점이 발생했으며, 이에 대해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개념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첫 번째,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주권
  절대주권과 자유의지는 절대와 상대의 관계로서 상호간에 양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보유하고 계신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립할 수 없게 된다. 자유의지는 스스로 생각하며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지로서 어떤 목적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모두가 우등생이 되며 성공할 것이고, 건강하며 장수하고, 세상은 불의와 전쟁이 없는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정신과 의지의 활동을 한다고 자기 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이지 그것들을 스스로 통제하거나 운영한다는 것은 아니다. 간혹 어떤 일이나 행동이 자기가 생각한 바대로 나타나거나 진행되는 것은 생각과 결과가 일시적으로 일치된 것뿐이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서 발생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건전하다는 신학자들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유독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만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유인즉,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고, 그렇게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유(自由)를 내포하고 있으며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절대주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도 하나님과 같은 자유의지와 주권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본질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본질에 의해서 생존하는 종속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유자이시며 절대주권을 보유하고 계신다고 해서 인간에게도 동일한 의지와 주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자 하나님께 종속된 상태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흔히들 자유의지를 논할 때 어항속의 물고기에 대한 예를 든다. 어항속의 물고기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처럼 인간도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 결정,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항에서 물을 빼버린다면 물고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자유롭게 활동하는 물고기의 의미가 어항 속에 물이 있을 때를 전제한 표현인 것처럼, 인간의 자유도 하나님의 의지와 절대주권에 종속되어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께 종속된 상태임을 명심해야 한다. 칼빈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할 때 마치 독자적인 상태의 의지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개념상의 충돌을 유발하게 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락의 유무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내재하는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 종속된 상태에서의 종속적인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생활의 규범과 계시방편으로서의 율법
  개혁주의 신학사상 중에서 심층적인 시각으로 재정립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율법관이다. 율법에 대한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했기 때문에 폐해져야한다고 주장하는 폐기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옹호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종교적인 제사법과 사회적인 율례법은 완성하셨으나 도덕적인 계명은 성도들의 규범으로 채택하여 지켜야 한다는 규범론 등으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칼빈 역시 율법의 계명, 율례, 규례 중에서 계명을 상도생활의 규범으로 채택하여 도덕법으로 명명하여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칼빈의 율법관은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성도생활의 규범으로 고착화 되었다. 그 결과 주일을 안식일로 대치하고, 연보는 제물의 성격을 함의한 십일조로 명문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성도생활의 규범으로 규정한 율법관은 성도들을 법적으로 얽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외식하는 자로 만든다. 성도의 생활 원리는 법적인 제제나 규칙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데 있다. 복음적인 성도의 생활은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내면적인 변화에 따른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뜻한다. 생활이나 행동은 내면세계의 성숙도에 따라서 나타는 현상이다. 그 현상은 법적인 제도나 제제에 의해서 억지로 유발되는 경우와 진정한 가치와 소명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구분된다.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농도에 따라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뜻한다. 자녀가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효도하는 것이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거나 이해관계 때문에 실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생활은 규범화 된 제도나 체면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결과에 따라서 발생되어 지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이며, 그들의 삶을 통해서 실행하되 하나님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나게 하시려는 계시의 도구이다.출 20:1~2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내용은 주변 국가의 법(法)과 유사한 조항들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은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려는 종교적인 색채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생활과 제사규례가 이방국가와는 완전히 차별화됨으로서 문화적으로 구별하셨다. 이와 같은 용도로 주어진 율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욱 명료하고 실체적으로 증거된 것이다.
  예수께서도 자신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라는 말로써 규정하고 있다. 예수의 율법관은, 율법은 자신이 성취할 것을 약속한 것이며, 모형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밝힌다. 그는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본질적이며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더욱 완벽하게 구성한다. 구약의 율법은 드러난 행위만을 판단했으나, 그리스도는 내면적인 마음의 상태까지를 포괄해서 정죄한다. 구약의 살인은 살인하는 행위를 규정했으나, 그리스도는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까지로 규정했다. 그는 자신이 완전하게 구성한 입법을 완벽하게 실행하며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율법관은 성취와 실체의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앞의 단원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율법은 복음에 대한 모형이며, 복음은 율법에 대한 실체이다. 이 말은 율법과 복음이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지만 증거의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매개로서 구약에서는 모형적으로 주어진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억하여 경외하였고, 신약에서는 실체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며 경외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을 규제하거나 조율하기 위한 규범적인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복음에 대한 약속이며 모형이다.

  세 번째, 인간의 구원과 그리스도 증거의 계시사
  구속사의 논리는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신학의 이슈(issue)는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 집약되고,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진한 점이다. 그 결과 ‘구원’은 기독교의 명제로 자리매김 되며, 신학의 교리적인 도그마(dogma)가 된다. 구속사 신학의 문제점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이 신학의 주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인간 중심의 신학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섭리의 출발이 인간의 타락에 기인하며,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구속을 위한 신학이 되며, 인간이 마치 섭리의 중심점에 위치하게 되는 주체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목적으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증거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뜻이다. 성경의 필요성은 창조계시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특별계시로 주어진 것에 있다. 특별계시인 성경의 기록목적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고 경외하게 하려하심에 있다. 특별계시인 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기 위한 계시의 절정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계시의 절정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확증시켜 주신다는 말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사역목적은 단순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닌 좀 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 하려는 목적달성의 수단이며 지엽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구원사를 신학의 전면에 배치하고, 신학의 중심명제로 채택하여 신학의 표제로 설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성경의 구성 체계를 보더라도,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며,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취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과 성취라는 말은 그의 구원사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물 자체를 포괄적이며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언약한다는 말은 역사서(창~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약속하고, 시가서(욥~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속성을 약속하고, 선지서(사~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약속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역의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여 승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성경전체의 구조에서 보면 언약과 성취의 원리를 이루기 위한 한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임을 알 수 있다. 구속사신학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위치설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인간의 구원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는 방법이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한 것에 있다.
  구속사는 분명히 성경의 쟁점이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와 계시의 목적에 충실하지 않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단면에 집착한다면 신학의 본질을 오도할 수 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약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 오신 것임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금까지 칼빈의 열정과 하나님의 영광중심의 신학사상을 검토해 보았다. 오직 진리만을 위한 그의 집념과 용기와 치열한 삶이 신본주의 신학의 체계를 확고히 했다. 그는 그 당시 구축되었던 거대한 종교 세력과 견고하게 굳어진 교리의 독단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횡포와 유혹에 맞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체계적으로 증거하며 저술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4~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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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브로밀리, 『칼 바르트 신학개론』, 신옥수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제임스 C. 기본스, 『교부들의 신앙』, 장면 역, 가톨릭출판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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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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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제, 『기독교대백과사전』, 반포교문사, 1984.
한국성서연구원, 『성서원어대전』(1~7), 브니엘출판사, 1985.


[저자약력]
총신졸업
로고스신학연구원 졸업
전, 로고스신학원 원장
현, 한국크리스천신문 미디어국장
현, 로고스신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현, 성경신학연구소 연구위원
현, 로고스성도대학장
현, 동산교회 담임


[저서]
사복음서의 통일성 연구
성경해석의 기초
기독교강요 이해(1권)

[신학논문 및 소고]
펠라기우스주의 논쟁에 대한 재평가
M. Luther의 신학 사상에 대한 성경신학적 검토
역사서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W.C. 카이저의 구약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1)
W.C. 카이저의 구약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2)
사복음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각 복음서의 특수내용 연구(1)
각 복음서의 특수내용 연구(2)
누가복음서의 논리
성경신학적 은사관
성경신학적구원관
성경신학적 종말론
성경적 자녀교육
성경신학적 율법관
성경신학적 교회관
고난의 의미
찬송의 이유
언약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과 신학적 의미
J.칼빈의 [기독교 강요] 분석
선교의 성경신학적 의미
신앙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
신학에 대한 이해
성경신학적 기도관
성경의 언어 이해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
성경신학적 성도의 교제
%% 책 표지 뒷면에 들어갈 내용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조류는 ‘인류의 구속’이란 명제에 함의되어 구속사역에만 편중되어 왔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구속이란 틀 속에 종속시켰을 뿐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신존재확증’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몰입되지 못한 점이 있다. 집필자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신존재확증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계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제 16 장 그리스도의 기능(技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