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4-11-09 19:4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제4장 스콜라 신학자들의 회개론

고해성사(告解聖事)
칼빈은 사죄가 회개의 절대적인 요건이 아니라는, 그의 회개론에 반(反)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해성사(告解聖事)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필자는 스콜라 신학의 대표적인 학자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신학대전』 요약본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해성사를 고백의 정의, 필요성, 집전자(執典者), 효과 및 보속(補贖)의 정의와 작용 그리고 천국열쇠의 능력에 대한 것과 그 효과의 순으로 정리해 보았다.
고해성사의 질료는 뉘우치는 감각적 행위이다. 즉, 통회(痛悔), 고백(告白), 보속(補贖) 등의 행위이다. (중략) 뉘우침(통회)은 죄를 고백하고 또 그 죄를 참회하는 일과 더불어 지니게 되는 죄에 대한 아픔을 말한다. 이것이 뉘우침에 대한 정의(定義)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를 아파하는 것은 뉘우침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행위의 시작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세례 이후 저지른 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필요성을 위해 세례 이후의 죄를 지닌 사람에게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고해성사는 구원의 두 번째 널판지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교회의 성사를 실제로 받지 않았거나, 또는 적어도 그럴 원의(願意)가 없었다고 한다면 죄는 사해지지 않는다.  고백은 그것을 성사로서 수행하는 데 사제(司祭)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이고 또 신비적인 육체에 대해서 능력을 지니는 사제만이 그 은총을 분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사적 고백은 오직 사제만이 수행할 수 있다. 어떤 평신도에게 고백한다면 그것은 단지 겸손의 훈련일 것이다. 고백성사의 권리를 받은 사제들은 어느 의식에 속하든지, 자기 주교에게서 아무 제한 없이 합법적으로 받았다면, 그 교구 전역(全域)에 걸쳐 행사할 수 있고, 고백은 영원한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현세적 형벌을 감소(減少)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고백은 그 자체로 창피함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형벌인 까닭이다.
위의 글에서 아퀴나스는 고해성사를 통회, 고백, 보속의 행위로 구분하고, 정의는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이며, 그 동기가 형벌의 두려움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의 구원관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세례의식을 통해서 성립되는데, 이것은 믿기 이전의 죄 용서에만 국한되고 믿은 이후의 죄는 철저한 고해성사의 과정을 거쳐야만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 후에야 구원에 도달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열쇠를 위임받은 사제가 필요하고 그들에 의해서만 고해성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속죄권을 위임받은 사제가 집행한 고해성사야말로 영원한 형벌에서 자유롭게 하며, 현세에서의 형벌도 감소시킨다고 한다.

보속과 열쇠의 정당성
다음은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고해성사의 성립요건으로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대가를 치르는 보속(補贖)과 열쇠의 정당성에 대해서 살펴본다.

보속(補贖, satisfactio)도 하느님의 법과 인간의 의무 사이에 정의로운 수단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보속은 죄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그 정의를 보충하고 있다. (중략) 보속은 선한 일, 또는 하느님께 영예(榮譽)를 드리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형벌 또는 참회의 의미를 지니는 일로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중략) 만일 보속이 우리들의 부족함 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영혼, 육체, 그리고 외적인 행운의 축복들의 부족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족함은 기도, 단식, 그리고 자선(慈善)과 관련된다. 또 이것이 참으로 보속 행위가 된다. 열쇠의 힘은 낙원의 문을 여는 힘이며, 또한 우리를 죄에 대해 닫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 능력은 본인의 권리로서 지니고 계신 삼위 일체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또한 수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권리가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의 효과가 담겨져 있는 성사를 베푸는 직무자에게도 속한 것이 되었다. 고해성사 안에서 열쇠의 능력은 일시적 형벌의 사면(赦免)에도 작용한다.

위에서 밝힌 대로,  고해성사에 대한 아퀴나스의 신학적인 입장은 고해성사가 구원의 요건으로서 필수이며, 자범죄에 대한 사죄(赦罪)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고해성사(聖事)가 집행되어져야 하고, 그 성사는 반드시 사제를 통해서만 속죄의 효능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신학적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영원한 속죄의 효능과 그 미치는 범위에 대한 문제점과 함께 그리스도만이 속죄의 주체가 되시는 그 절대성을 훼손시킨 것에 대한 문제점을 가진다. 영원한 속죄의 범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초월한 사역이며, 속죄의 효능이 미치는 것도 시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리스도를 믿는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믿기 이전과 이후의 속죄효능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에 대한 개념의 미숙함에서 기인된 것이다. 속죄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에게만 속죄의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는 천국열쇠에 대한 성경해석의 오류로 인해 속죄권한이 사제에게 이양된 것으로 이해한다.

칼빈의 회개관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해성사를 반박하면서, 차별화된 자신의 회개관을 개진한다.
회개가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죄 사함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죄를 깨달아서 괴로움을 당하고 상처를 받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회개가 죄 사함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더욱이 그들은 영혼의 고통을 하나의 의무로서 이행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고통들도 제거해 버렸다. 죄인은 자기 자신의 뉘우침이나 눈물에 집착하지 말고 두 눈을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맞추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위의 글에서 칼빈은 회개가 죄 사함의 원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는 필수요건이 되므로 교황주의자들처럼 의무조항으로 규정해서 강요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칼빈의 견해대로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의 고백관에 대한 비판과 하나님의 긍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받기위한 선 요건으로서의 회개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異見)이 있다. 하나님의 긍휼은 창세전부터 수혜자가 확정되어 있으며, 그들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가 조건으로 요구되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죄인임을 모르면 긍휼을 구할 수 없고, 알면 구할 수 있다는 논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속성을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라야만 가능하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