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4-12-28 18:1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회개와 속죄의 관계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단면만 보고 해석하면 안 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죄와 사망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주어진 의(義)와 생명도 없었을 것이고,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의 노예가 되어 감옥에 가는 사건이 없었으면 총리가 될 수도 없었고,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선과 악을 합력해 선(善)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첫 아담의 타락으로 죄인되어 죽게 하신 다음 둘째 아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되게 하여 살게 하심으로써 합력해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총합적인 체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전체적인 범주로 해석해야 한다. 타락과 구원, 죄와 의(義), 사망과 생명을 하나의 체계에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타락을 통해서 구원의 은총을, 죄인의 상태에서 칭의(稱義)의 감동을, 사망의 저주에서 생명의 진가를 깨닫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섭리의 진면목임을 알 수 있다.
죄는 의롭게 하기 위함이요, 정죄는 사죄를 받게 하기 위함이요, 사망은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요, 타락은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요, 첫 아담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보내기 위함이요, 이 모든 것은 영원한 작정을 성취하심으로서 여호와의 존재를 확증하게 하려 하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죄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 용서, 사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 영원한 속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에 대한 은혜의 영광을 깨닫게 하려 하심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회개는 통회자복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을 조건 없이 의롭다고 인정하고 선언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통찰하는 것이다. 그 은혜의 감격은 죄를 많이 깨달을수록 배가되며, 인간의 본성을 파악할수록 감사가 넘치게 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고 증언한다. 이 말은 율법은 인간의 죄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난 죄의 농도가 짙을수록 속죄주(贖罪主)되신 그리스도의 은총에 탄복하게 된다는 뜻이다.
 
고백 폐지론
스콜라 신학자와 칼빈의 주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회개관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크리소스톰에 의해서 전적인 폐지론이 주창되었다.

여러분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여러분의 동료 시종들이 다 보도록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억지로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을 하나님의 임재에로 가져가 그의 앞에 펼쳐 놓으십시오.

크리소스톰의 말대로 인간이 자기의 과오를 대중이나 개인을 향해서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는 인격적인 종교이다. 개인의 수치나 모욕감을 유발시켜서 회개의 의미를 증폭시킨다는 것은 비인격적인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형제가 죄 범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는 당사자 간에 해결할 것을 권한다. 성경은 인간의 죄가 무엇이고, 얼마나 치명적이며, 누구든지 죄 앞에서 자유롭거나 스스로 정결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 또한 죄 문제는 어떤 경로로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과, 해결 받은 이후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스콜라 학파와 같이 사제(司祭)라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의 죄를 고백 받고 용서해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교리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똑같은 죄인이라는 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그리스도 외에는 인간의 죄를 심판하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그 누구도 없다. 일평생 실수할 때 마다 사죄의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능이 미약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에 대해 스콜라 신학자들은 어처구니없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죄와 벌은 구별되어, 죄는 사하여 졌을지라도 그 벌은 남아 있는데 예를 성서에서 볼 수 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자기 오라비에게 원한을 품어 죄를 지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누이의 죄를 사하여 주셨지만, 그 벌로 그녀를 문둥병에 걸리게 하여 이레 동한 백성들로부터 격리되어 있게 하셨다(민수 12,1-15 참조).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을지라도 그에 해당하는 벌은 남아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 벌을 보상하여야 한다.

위의 글에서 보면,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졌지만 미리암은 그에 상응하는 형벌은 받았다는 것인데, 순서를 바꿔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저주로 미리암은 이미 문둥병에 걸려 있었고 그 상태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설령 순서가 바뀌지 않았더라도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으로서, 모세의 간구와 응답은 장차 속죄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실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다. 이러한 구약성경을 현금의 신자들에게 바로 적용한다는 것은 해석학적 오류이다.
구약에 나타난 사건을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빌미로 삼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은 죄로 인한 형벌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죄는 용서했지만, 그에 따른 형벌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효능과 의미가 퇴색되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