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5-01-18 18:3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보속과 형별교리에 대한 칼빈의 반박
칼빈은 스콜라주의자들의 보속과 형별교리에 대해서 성경적인 근거와 형벌과 징계를 세분화시켜 분류하여 명확하게 반박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고(사 53:6) 그가 맞으신 채찍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다(사 53:5)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고(롬 8: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갈 3:13)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 저주와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사망의 형벌과 함께- 친히 담당 하시고 제물로 드리신바 되셨을 때에, 그의 육신 속에서 죄의 권세와 저주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처음 죄를 씻은 이후부터는 우리 각자가 회개에 합당한 보속을 드리는 정도만큼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능을 느낄 수 있다는 그들의 거짓된 이론 같은 것은 여기서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죄를 범할 때 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보속을 의지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형벌을 위한 심판(judgment of vengeance)이라 부르고, 또 하나를 징계를 위한 심판(judgment of chastisement)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러면 형벌의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향하여 복수하시는 심판으로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그의 진노를 발하시고,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고, 완전히 멸절시키신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복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형벌에 그의 진노가 합쳐져서 나타는 것이다.
징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심이 그렇게 심하지 않고, 완전히 멸망시킬 정도로 벌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형벌 혹은 복수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정과 훈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형벌을 위하여 심판이 가해질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거기에 드러나지만, 신자들의 경우에는 정대로 그런 일이 없다. 반대로 징계를 위한 심판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축복이요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욥 5:17; 잠 3:11-12; 히 12:5-6).

칼빈의 말대로 형벌은 불택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고, 징계는 택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이다. 형벌적인 심판은 불택자들이 영원한 저주를 받음으로써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되는 궁극적이며 본질적인 것인 반면에, 징계는 탕자의 비유와 같이 택자들의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교육적 방편인 것이다. 또한 시련은 욥과 같이 범죄행위와 상관없이 택한 자들을 연단시켜 믿음을 성숙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방법이다. 칼빈은 스콜라신학자들의 형벌관에 대해서 형벌과 징계라는 신학적인 주제를 통해서 정확하게 비판하였으며 형벌교리의 허구성을 지적하였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속죄
필자는 칼빈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그리스도 사역의 영원성을 보충해서 개진해 본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본질적인 면에서는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고, 효과적인 면에서는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사죄를 뜻하며, 성격적인 면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실현되는 영원한 사역인 것이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11절에서부터 14절까지에서 그리스도 사역의 영원성을 다음과 증언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에 드리는 제사로써, 영원한 속죄의 효능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로마 카톨릭 교회가 행하는 속죄를 위한 고해성사는 사제들의 권위를 정당화 시켜 신자들을 죄책의 공포로 몰아넣는 야비한 기만술책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논의된 핵심의 쟁점은 ‘사죄(용서)’가 회개의 전제조건이 되는가의 여부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2권 1장에서 원죄(原罪)와 자범죄에 대해서 논증 한 바 있는데,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인간의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한다. 회개와 관련된 사죄의 문제에 있어서도 원죄와 자범죄를 자연스럽게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칼빈과 교황주의자들은 모두 믿음 이후에 발생하는 자범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위한 철저한 회개가 반드시 그리고 지속적으로 병행되어져야함을 고집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효능은 원죄(原罪)에만 적용되고, 자범죄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죄는 모두 용서되었지만 자범죄에 대한 책임은 남아있다는 것인지가 모호하다. 이것에 대한 문제는, 그리스도 속죄사역의 효능에 대한 성질과 범위에 있고, 또 하나의 문제는 원죄와 자범죄(自犯罪)에 대한 이해방식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죄에 대한 의미를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법을 불순종한 결과로 형성된 죄의 형식을 죄의 본질로 오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법을 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아진 것이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절대자 하나님밖에 없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심판주요, 주체가 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싫어하시고(惡),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 구체화되어 자리 잡은 것을 죄로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모든 인간은 죄 중에서 잉태하여, 죄 중에서 출생한 죄인이 된 것이다. 죄가 인간의 내면에 근원적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내면에 자리한 욕심이 밖으로 표출되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범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도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마5:27~28)라고 말씀하심으로서 행위와 상관없이 마음의 상태 자체를 죄로 규정하신다.
따라서 죄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욕심을 가리키며, 마음의 상태를 밖으로 표출시켜 행동화한 것을 범죄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런즉 범죄는 죄와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으며, 원죄(原罪)든지 자범죄(自犯罪)든지 간에 모두 죄의 범주에 포함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분류해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죄와 범죄를 본질적인 현상의 일원론적인 체계에서 정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영원한 효능을 지닌 완전한 대속사역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속죄 사역은 본질적인 죄(원죄) 뿐만 아니라 현상적으로 나타난 범죄까지를 전부 포함하는 대속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회개의 신학적인 쟁점이 된 사죄의 문제는 이와 같이 영원한 속죄의 범주와 효능의 개념을 파악하고, 본질적인 죄의 개념을 이해하면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제5장 면죄부와 연옥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