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5-06-15 21: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제2부 (6~10장) 성도의 생활

성도생활의 실제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으로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사는 것이다. 칼빈은 성도의 생활은 첫째, 세속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한다. 둘째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당하는 고난이며, 인내와 복종을 배우고, 영적인 기쁨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부정

첫째, 세속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삶에 대해서는 세속과의 관계에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자신에 대한 근심과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상대로 살아가야 하고, 인간의 본성을 모두 거부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신자의 삶에 대한 완전한 규범이 이미 하나님의 율법에 아주 질서정연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우리 주님으로서는 그의 백성들을 좀 더 정확한 방법으로 훈련시켜서 율법에 제시되어 있는 그 규범에 이르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신 것 같다. (중략) 우리가 취하여야 할 첫 걸음은, 우리 자신을 버리고 우리의 모든 능력과 정력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말로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정욕을 버리고 성령의 부르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바울은 이를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엡4:23)-야말로 생명에 들어가는 첫 관문인데, 철학자들은 이것을 전혀 몰랐다. (중략) 그 다음 또 하나의 원리가 이어지는데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곧 나 자신을 부인하며 나의 생각을 죽이고, 주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이들을 행하는 데 온 마음을 쏟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그런 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성경은 또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존중하고 높이며 또한 그 당사자를 존귀히 여기라고 명령한다.

위의 글은 예수께서 성도들의 선한 생활을 위해서 율법을 생활 규범으로 채택해서 성도로써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며, 오직 주님의 뜻과 주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가야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이웃의 은사를 존중하고 그들을 존귀하게 여길 것도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순종하며 이웃에게까지 선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성도의 자세는 불신자와 확연히 다르고 차별되어져야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성도는 의지하는 대상이 다르며, 생활의 목적과 이유가 확실히 구분된다. 불신자들은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 또는 환경이나 사람을 의지하지만 성도들은 오직 유일신(唯一神) 하나님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한다. 전지전능(全知全能), 만고불변(萬古不變), 절대주권(絶對主權), 영원무궁(永遠無窮), 무한자비(無限慈悲)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안정감을 얻고, 평안함을 누리고, 만사가 형통하고, 진정한 가치를 찾게 되며 그 결과 사랑의 포로가 되어 행복의 절정에 서게 된다.
하지만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성도들의 선한 생활은 율법의 규범에 매여 실천해야하거나,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다분히 조건적이며, 인과(因果)적이고, 강제적인 성향과 함께 은혜의 감격을 누리기보다는 선행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만 증폭될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성도의 선한 생활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한 마디로 정의하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認定)한다는 것은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뜻)대로 섭리되는 것을 수용하고, 만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집행되는 것을 수납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확증이 선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속성(屬性)과 사역방법을 인지해야 한다. 성경은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성취 체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게 한다. 구약성경의 시가서는 하나님의 오대속성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증거하고, 구약의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사역방법을 확인시켜준다.
칼빈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게 위해서 율법의 규범과 하나님의 명령을 제시한다. 물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자세이지만 어떤 원리에 의해서 시행되느냐는 숙고해 보아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이나 수련 그리고 어떤 규범이나 제도에 의해서는 한계가 있다. 통제수단으로서의 법과 종교적인 계율로서의 규범은 인간을 법칙으로 제재(制裁)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자기부정은 어떤 제도나 계율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확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통제나 억압 그리고 명령과 당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인식의 결과로 주어지며 자유와 평화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기독교윤리의 이치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인간의 욕심이 조절되고, 인간의 본능이 절제되는 만큼 선한 행위가 수반(隨伴)되게 된다. 선행의 중요한 관건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만큼 아느냐(인정)에 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농도만큼 인간의 태도가 달라지는데 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선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구속의 은총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거나,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거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거룩해져야 한다거나,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야 된다면 이것 또한 강력한 계율로서 또 다른 억압의 장치가 된다.
기독교 윤리는 성도들을 어떤 제도나 규범, 법칙, 의식, 당위(當爲), 상벌조항 등에 의해서 행위를 강조 및 통제, 교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평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출발은 억지가 아닌 자원(自願)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신앙양심의 자유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 그것이 설령 진리를 위한 일이든 교회를 위한 일이든 어떠한 선한 명분에 의해서라도 강제나 당위에 의해서 집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원칙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의 확신에 기초한 것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이며,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할 수 있고, 성경을 알아야만 올바른 가치발견과 인간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의 생활은 어렵거나 부담스러운 과제가 아니며, 명분과 체면과 당위에 의해서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며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면서 선한 일을 위해서 즐겁게 사는 것 그 자체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