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5-11-16 22:2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독교강요 이해


제 3 부 (11장~19장) 성도의 칭의
칭의 인식의 수단
칼빈은 12장에서 선물로 주어진 칭의의 교훈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심판을 의식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하늘의 심판주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죄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서 기꺼이 몸을 숙여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칭의에 대한 논의 전체가 어리석은 것이 되고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철저히 몰아내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에만 의지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누릴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중략)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면 할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훼방하는 것이다.
칼빈은 위의 글에서 인간의 죄와 죄책을 통해서 인간 자신에 대한 신뢰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만 의지하게 될 때라야 칭의의 은혜가 온전해 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공로주의를 반박하려는 칼빈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 순서가 바뀌었다. 신학의 초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런데 칼빈은 신학적인 명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주창하지만 논의과정에서는 그 부분을 간과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죄와 심판을 끌어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칼빈의 의도는 인간이 죄인임을 확고하게 하여 인간의 의로운 행위나 공로를 일축하려는데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속죄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고 증거하고 있다. 바울의 말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타락과 관계없이 창세전부터 이미 베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타락하고 구원하시는 섭리를 전개하셨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것 역시 바울의 글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7~10)는 데서 분명해진다. 은혜의 본질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인간의 타락과 무관하게 베풀어진 것이며, 은혜의 수단은 타락한 인간의 죄를 속죄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확증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도는 하나님의 뜻(작정)을 성취하심으로서 감추어 졌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에 있고, 직접적인 의도는 타락한 인간의 죄를 속죄해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의 영광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먼저 복을 주신 다음 타락과 구원의 역사를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는 창조하시자마자 생육번성, 땅 정복, 다스리라는 복을 허락하셨고 이스라엘의 열조 아브라 함에게도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큰 민족을 형성시켜 주실 것과 가나안 땅을 주실 것과 열왕(列王)이 출생 하여 나라를 세우고 다스릴 것을 복으로 주셨다. 그런 다음 아담은 복을 받은 이후에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실현하게 하셨고, 아브라함의 후예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 때문에 범죄와 불순종, 애굽의 노예와 나라의 분열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구출해 주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와 저주의 늪에 빠져 죽었을 때 타락과 상관없이 언약을 근거로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사 백년간 혹독한 노예생활을 시킨 다음 해방시켜 주시며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타락(죄)과 무관한 본질적인 것과 인간의 타락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는 도구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칼빈의 관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인 은혜의 수단에 초점을 맞춘 죄 와 용서의 도식으로 구성된 구속사신학의 전형이지만,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은 은혜의 본질과 수단을 총합적으로 설명하는 계시적 관점의 신학임을 알 수 있다. 성경적인 신학적 탐구방법은 어떠한 주제라도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예정)을 근거로 해서 개진되어야 근본적인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계시적인 목적에 접근할 수 있음을 간과하면 안된다.
칭의 교리의 과제
칼빈은 13장에서 칭의의 교리에서 유념해야 할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언급한다.
첫째, 주의 영광이 흐려지거나 손상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 되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며 평안과 안식과 고요한 마음의 평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의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하게 또한 손상 받지 않은 상태로 유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사람이 의의 지극히 작은 부스러기라도 스스로 취하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깎아내리는 것이므로 결국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약속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근거로 할 때에 비로소 그 약속이 풍성하게 확증되는 것이다. (중략)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약속하시면 그가 반드시 성실하게 이행하신다는 말이다.
위의 글에서 보면,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어떠한 의(義)도 부과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면서 의롭다하심을 얻게 된 것에 대해 마음의 평정을 누려야 된다고 밝힌다. 물론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칼빈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에 영향을 준다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칭의의 은혜를 인식한다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특성을 살며보면 ‘영광’은 히브리어 카보드인데, ‘영화로움’, ‘존귀’, ‘풍부함’으로 하나님의 거룩성, 완전성, 탁월성, 임재를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스스로 충족하시고, 모든 것에 완전무결하시며, 지혜와 지식의 근본으로서 모든 것에 탁월하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와 섭리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됨으로서 완전하고, 탁월하고, 거룩하심의 속성을 드러낸다.
혹자들은 완전무결하고 탁월한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이나 사탄에 의해서 손상, 훼손되거나 격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주요, 절대자요, 무소불능의 권능이기에 부족감이나 훼손이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고 말함으로써 자충족(自充足)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한다.
또한 칼빈은 칭의의 은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타락과 죄 용서라는 맥락에서 개진되기 때문에 죄와 관련된 심판을 의식해야만 마음의 평정이 유지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칭의의 개념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죄와 용서 그리고 심판이라는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칭의의 근원이 타락(죄)과 무관하게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섭리에 있음을 확고히 해야만 은혜의 농도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인간의 행위와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창세전에 이미 의로운 아들로 예정하신 본질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칭의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의로운 아들이 되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죄 중에서 죽였다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가 되게 하시는데 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약속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근거로 할 때에 비로소 그 약속이 풍성하게 확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약속의 의미는 타락한 죄인을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시작하는 구속사적 맥락의 논리이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의 근거는 피조세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세전 작정과 예정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섭리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모든 섭리의 의도가 하나님의 계시에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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