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6-03-30 21:3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제4부 (20장) 성도의 기도


기도의 유익

칼빈은 기도의 유익을 성도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첫째로, 기도는 하나님을 찾고 그를 사랑하며 섬기고자 하는 진지하고도 열렬한 소원으로 우리 마음이 항상 불타오르게 해 준다. (중략) 둘째로,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 부끄러운 욕망이나 바람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 (중략) 셋째로, 기도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은택들을 진정한 감사와 찬송으로 받게 해 준다. (중략) 넷째로, 우리가 구한 것들을 받아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깨닫게 되고 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욱더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다섯째로, 우리의 기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그 축복들을 더욱더 큰 기쁨으로 환영하게 된다. 마지막 여섯째로,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을 통해서 확증하게 해 준다.


칼빈은 기도의 유익에 대해서 신앙의 열정을 갖게 하고, 인간의 욕망을 차단하며, 하나님의 은택을 수용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확립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의 은총을 환영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체득하게 하는 동인(動因)으로 인정한다. 이 말은 인간의 기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될 때 주어지는 유익을 거론함인데, 이러한 유익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존재 확증과 작정 자체를 인식할 때 더 적극적으로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당사자의 상태는 어떻게 되겠는가,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고, 분변하며, 소원하는 영적예배의 형식이기 때문에 응답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통로이다.


칼빈은 기도의 유익과 연계해서 유의사항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안에서만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마음을 토로하라고 말씀하시지만(시62:8; 참조 145:19), 어리석고 부패한 정욕에 대해서 무분별하게 고비를 늦추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신자들의 변덕스러운 마음과 생각에 자신을 굴복시키면서까지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면, 어리석고 부패한 정욕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준이 모호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교회당 건축이나 교회 개척을 위해서 물질을 구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가이다. 아무리 선한 명분이라 할지라도 이것 역시 하나님의 작정과 뜻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루어 질 수 없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어떤 선한 명분조차도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어 진다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확보한 후 하나님께 간구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신 사례가 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천명(闡明)한 바 있다. 기도의 근간은 하나님의 작정과 뜻에 기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은 너무도 타당한 것이다.
칼빈은 지금까지 기도의 당위성과 내용 그리고 유익한 점과 유의해야 할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며, 이제는 기도의 주체를 통해서 교황주의자들의 오만방자함을 논박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기도의 주체가 인간인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체는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해당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천명한다.

기도의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요 통로이시므로(참조, 요 14:6), 이 길에서 벗어나고 이 통로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다른 길도, 통로도 남아 있지를 않다. (중략)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그의 간구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은혜로우시며 우리를 용납하시는 분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온 교회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간구들이 그리스도의 그 유일한 중보기도를 기반으로 한다는 원리를 여기서 확고히 세워야 할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 외에도 중보기도와 중보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의 사상을 강력한 논조로 비판한다.

궤변가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터무니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중보자(the Mediator of redemption)이시나 신자들은 중보기도의 중보자들(mediators of intercession)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일시적으로 중보 사역을 이루셨을 뿐이고 영원한 불변의 중보사역은 그의 종들에게 남겨두기라도 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극히 작은 영광의 일부분만 떼어내는 것처럼 떠벌리면서 그리스도를 아주 부드럽게 대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
  그들은 점점 각 성자마다 독특한 기능을 부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사안들이 있을 때 어떤 경우는 이 성자를 중보기도자로 불러올리고, 또 어떤 경우는 다른 성자를 중보기도자로 불러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각 사람마다 특정한 성자를 자기의 수호신처럼 취하게 되었고, 그 성자가 자기를 지켜준다는 식의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시의 수효만큼 신들을 세운 것은 물론 -오래전에 선지자의 이런 행위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책망했었다(렘 2:28; 11:13)- 인구의 숫자만큼 수호신들을 세운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권세를 도용하기 위해서 성자 숭배를 교리화 했으며, 그로 인해 자기들의 권위도 합법화했다. 하지만 칼빈은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확보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조금 앞에서 그가 언급한 기도들(딤전 2:1-2)을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할 것을 말하고 나서 이 말의 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곧바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중략) 육체로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성자(聖者)들에 대해서는, 혹시 그들이 기도한다손 치더라도 홀로 길이신 그리스도(요 14:6) 이외에 그들이 하나님께 간구할 다른 길이 있다거나 혹 하나님께서 다른 이름으로 그들의 기도를 받으시리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대속사역을 담당하신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기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책임지는 일도 불가능하지만, 인간이 중보자의 위치에서 어떤 권한이나 권세를 행세한다는 것은 신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된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불식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기도의 원형을 제시해 주셨고, 칼빈 역시 주기도에 대한 이해와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한 것 같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여호와의 영원성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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