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9월 3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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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 작성일 : 22-06-20 22:16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의미를 “계시가 어떻게 사람에게 계시됨(Offenbarsein/ revealedness)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을 대답할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인격 안에 있는 한 참 하나님 그리고 주님 자신이 우리를 위한 계시됨이다”라고 했다. Wir wissen von der Trinitätslehre(the doctrine of Trinity) her, daß es auf die Offenbarsein der Offenbarung für uns Menschen? keine andere Antwort geben kann als die: der eine wahre Gott und Herr selber, in der ,,Person" des Heiligen Geistes, ist sein Offenbarsein für uns(KD., 222).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존재)이 아닌, “삼위일체론”(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의 신관을 일신론(der eine wahre Gott) 체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계시를 중심으로 계시자와 계시됨, 계시의 삼중성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Revealer이고, 주, 예수는 Revelation(계시)이고, 성령은 계시됨(계시된 존재[현실]) Revealedness이다. 바르트는 교회에 있는 삼위일체론에서 “한 참인 하나님”을 파악할 것이며, 우리를 위해 계시됨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한다. § 15. 계시의 비밀에서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objecktive Wirklichkeit Offenbarung)”이 ‘계시’로 제시했고, § 16.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에서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subjecktive Wirklichkeit Offenbarung)”은 ‘계시됨’으로 제시했다. 바르트의 계시는 현실성으로 가치가 되는데, 계시의 현실성(Di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은 객관적 현실성과 주관적 현실성으로 나뉜다. 객관적 현실성은 계시가 현실화되는 규범적이고 모범적 사례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객관적 현실성을 예수로, 주관적 현실성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다. 주관적 현실성은 각 사람에게 개별적 발생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계시됨’으로 연결시키는 내용을 보아야 한다. 정통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바른 가르침으로 믿고 고백해야 할 계시의 첫 내용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사람에게 계시됨(Offenbarsein)”으로 유일한 가치를 제시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실체(Wesensidentität, 본질의 동일성)에 대한 고백을 넘어서는 질문이 있다고 제시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실체(homoousion)는 교리의 정점으로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바르트는 Wesensidentität(the identifying in essence, 본질 동일성)이라고 말하면서, 질문(Frage, question)으로 평가하고, 그 질문을 넘어서(über. above) 다른 질문의 가능성을 개방시켰다. 바르트가 제기한 질문은 성경에 있는 계시증거(biblische Offenbarungszeugnis)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은 “besonderer Gehalt(특별한 형태, sepcial content)”로 제시하고, 성경의 계시증거는 “bestimmten Weise(특정한 방법)”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계시가 일어남(Geschehen der Offenbarung, the occurrence of revelation)을 성령의 부어짐(die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으로 연결시켰다. 참고로 Ereignis와 Geschehen는 의미(-생기)가 비슷하다. 영역에서는 event와 occurrence로 번역했고, 신준호는 ‘됨’과 ‘사건’으로 번역했다. Ereignis(생기)는 존재 망각이 깊어질 때 진리를 회복하기 위해 인간이 필요한 상태로 현존재가 되고, Geschehen(생기)는 현존재에서 인간이 자기 존재가능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자는 하이데거의 어휘이고(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해제)), 후자는 니체의 어휘이다.(니체 『유고』(해제), 1.5.2.2. 힘에의 의지에 대한 명칭 2 : 생기)-네이버지식백과-
“계시가 일어남(생기)은 하나님으로부터 일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을 향한 것이라는 한도에서, 하나님 자신의 현재로서의 계시는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한도에서 우리들 인간은 계시의 일어남(생기)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로우며,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계시될 수 있는가? 어떤 한도에서 이 일어남(생기) 안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됨이 있으며, 그리고 그러한 한도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적 수용성이 있는가? 여기서 질문되는 것을 우리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서에서 이미 주어진 다음의 대답, 곧 성령의 부어짐을 뜻한다.”(GG., 261)


바르트의 특징은 자기 이해를 매우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정통 기독교에서 계시에 대해서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거나 못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정확하게 계시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신을 향한 자유(frei für Gott)이고, 인간을 향한 한도에서 신의 계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신의 계시가 인간에게 수용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일어남(Geschehen)은 성령의 부어짐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은 사람의 각자에게 일어나기 때문에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 된다.


그런데 바르트의 논리 전개의 문제점은 독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계시의 범위나 내용을 규정하지 않으면서 계시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신 존재에 대해서 ‘일신론’과 ‘자유’ 외에 다른 규정이 없다. 그리고 다른 조건은 자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불특정한 사안이 되는 불가지론이 된다.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의 매력은 신을 높이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런데 무지(無智)에는 인격적 관계를 이룰 수 없다. 독단으로 성령이 부어졌다고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경에서 성령의 부어짐은 자의적이 아닌 부으시는 주체가 명확하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But the anointing which ye have received of him abideth in you(KJV)”(요일 2:27). 우리는 바르트의 계시 이해(계시발생주의)를 우리와 같은 계시 이해로 채택할 수 없다. 우리의 계시는 충족되었으며, 합당한 사역자가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해석과 복음선포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계 2:-3:)


바르트는 계시의 개념(Begriff der Offenbarung)을 다시 정의하고 있다. 먼저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어떤 특정한 공간(bestimmten Raum)에 확정 짓는 것부터 제시한다(GG., 262). 바르트는 이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겠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것이 성경적 증거를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신의 행위(Gottes Tun)와 신의 자유를 근거해서 신학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을 (zu)믿고 (zu)순종하는 구도로 제시한다. 즉 예수를 믿는 구도가 아니라 신을 믿는 구도를 형성시키고 있다(Gottes Werk und Gabe in der Freiheit des Menschen, ihm zu glauben und zu gehorchen, KD., 224: CD., 203, in the Bible sense, God’s work and gift in man’s freedom to believe in Him and to obey Him). 바르트는 이러한 믿고 순종하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으로 규정하면서, 주관적(Subjektiven)에 특수성(Besonderheit, detail)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계시의 가능성을 말하면서, 특정한 공간이 머무는 것은 계시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바르트는 특정한 공간에 있는 것을 안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안경을 쓰지 않아야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권고한다. 칼빈은 안경을 써야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바르트는 정통신학이라는 안경을 벗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의 가능성, 계시가 현실화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조건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정통신학을 제한된 조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한국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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