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역사주의는 왜 퇴폐적인가?
니체는 기독교를 좀처럼 수용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기독교를 합리성의 이름으로 해체하려는 근대 지성도 강하게 비판한다. 니체는 객관성을 자임하는 근대 계몽주의에 대해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꾸는 파괴적 야만이라고 비판한다. 미래 삶을 창조하려는 동력을 미리 합리성의 이름으로 재단(裁斷)하는 계몽주의의 폐쇄적 역사관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생명력 자체를 소진시킨다고 비판한다. 가령 니체 당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지나치게 학문화하여 박제하는가 하면 신앙의 활력을 사장(死藏)시켜 박물관으로 옮기는 대표적인 퇴폐적 지적 문화다. 니체는 기독교를 비롯한 당대의 지적 문화 전반에 걸쳐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은 것’으로 관념화하는 지적 세계의 만행을 폭로한다.
니체는 종교, 예술 분야에서 창조를 자극하는 숭고함과 비밀스러운 신비감에 대해 경외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영역은 이성적 판단과 역사적 분석의 기술로는 제약할 수 없는 생명과 감동과 감화(感化)의 원천이 된다. 니체는 정신문화가 살아 있으려면 합리적 분석이나 과거 중심의 역사적 평가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활력이 넘치는 지적 문화란 자기 존중과 경외심을 위해 감성적으로 가려진 ‘안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니체는 ‘마이스터징거’에 등장하는 한스 작스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강조한다. ‘위대한 일은 결코 약간의 망상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니체에게 진정한 예술과 종교 그리고 위대한 정신은 어느 정도 신비, 망상, 광기가 함께 해야 가능하다.
신비를 보유한 삶을 ‘객관적 사실 탐구’라는 이름으로 폭로에 열을 올리고 지식 누적을 통해 삶을 지배해 보겠다는 역사 탐구는 철학, 예술, 신학을 단지 삶을 조작하고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니체는 이러한 지적 풍토를 수익 창출에만 미쳐버린 노동시장과 같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수익 창출에 눈먼 “흉악무도한 수단은 너무 밝고 너무 급작스럽고 너무 변화무쌍한 빛”(348)으로 현란하게 발광(發光)하며 이익 챙기기에 몰두할 뿐이다. 마치 외부에의 빛, 주위 대상들의 움직임, 환경의 다양한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새를 잡아 아름답게 지저귀는 소리만 듣고자 새의 눈을 멀게 하는 자들처럼, 노동 시장의 논리에 사로잡힌 역사학자들은 삶의 신비를 파헤치는 자신의 노동을 역사적 성과물인 양 자랑한다. 이러한 학자들의 행태는 마치 ‘계몽(啓蒙, Enlightenment, Aufklㅁrung)’을 이유로 삶의 깊이와 높이를 관조하는 지혜자의 자유를 박탈하고 더 유익한 정보를 만들어 내라며 지혜자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극악한 범죄에 비유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세계와 예술 영역의 ‘신비’를 없애고 단지 삶에 유익한 정보만을 강요하는 당대의 언론과 교육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한다. 당시 “역사적 감각, 역사적 교양”(349)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퇴폐주의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밀려 들어오는 양이 너무나 엄청나고, 낯선 것, 야만적인 것, 폭력적인 것이 ‘무서운 덩어리로 뭉쳐서’ 너무나 강력하게 젊은 영혼을 습격하여, 그는 의도적으로 둔감해야만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 정도다. (……) 젊은이들은 고향을 상실하고 모든 관습과 개념을 의심한다. (……) 그렇게 흘러넘치고 마비시키는 폭력적인 역사화는 옛사람들이 보여주듯이 젊은이에게 불필요하며, 근대인들이 보여주듯이 지극히 위험하다.(349)
니체에게 젊은 영혼을 압도하는 역사 정보는 미래의 창조 동력을 말살하는 야만적 폭력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폭력은 역사 속의 다양한 문화와 가치들을 상대화하여 해체하고 젊은 영혼의 정체성마저 근절시킨다. 그 결과 창조적 동력은 마비되고 지나친 역사 정보와 해석들을 통해 과거의 종으로 만들고 미래 창조의 실천적 의지를 병들게 한다. 이는 삶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창조 대신 무기력을 낳으며 자신의 실존을 병들게 하는 정신적 질병이 된다. 니체의 이러한 초기철학에서도 서양을 지배한 역사철학의 원리로서 ‘니힐리즘’을 감지할 수 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전기를 집대성한 전기(傳記) 문헌가, 철학사 정리자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 약 200–250년경 활동한 것으로 추정)를 인용해, 인간이 수립하는 사상 체계가 어떤 현실보다 더 ‘비극적’이라고 지적하는 시인 횔덜린(Holderlin)을 인용한다. 니체에 의하면 라에르티오스는 고대 철학사를 정리하면서 인류 지성사를 관통하는 ‘니힐리즘’을 간파하고 있다. 횔덜린의 말로 니체는 사상 체계의 비극적 운명을 이렇게 표현한다. “일시적이고 항상 변하는 인간의 사상과 체계는 우리가 보통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라 부르는 운명보다 내게 더 비극적으로 다가왔다.”(349) 역사 해석을 포함한 많은 사상들은 보통 현실의 모순과 비극, 갈등과 투쟁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변명하지만 니체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한 시도는 창조력의 소진으로 인해 반드시 비극적 파국을 맞이한다. 역사를 정복하고 다스리겠다는 역사주의는 반드시 자기 파국을 맞이한다.
여기서 모든 학문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자기 파멸로 향한다. 니체의 말이다. “사람들이 성숙하기 전에 학문 공장에서 일하면서 유용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면, 학문은 너무 일찍이 이 공장에서 이용되었던 노예들처럼 파멸할 것이다.”(350) 20대 후반의 고전 문헌학자 니체를 ‘니힐리즘’이 몰아가고 있다. 만약 학자들을 상업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면 “인위적으로 너무 일찍 알을 낳으라고 강요당한 암탉들이 죽어버리는 것처럼 너희는 그것을 가능한 한 빨리 파멸시킬 것”(351)이라고 경고한다. 마치 옛날보다 많은 알을 낳은 닭처럼, 당대 학자들의 “책들은 더 두꺼워졌지만”(351) 그 내용들이 미래 활력을 얼마나 보장하는지는 그 질이 매우 의심스럽다.
<275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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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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