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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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01 21:3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시간은 왜 지나가나?


“세월이 빠르다”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과거를 회고하는 감정이 들어 있다. 대개 사람에게 속는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한다. 시간은 정확하게 지나가고 있다. 이 말에 대해서 누구라도 강하게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남한과 중국 사이에 위치하여 주도권을 쥐기 위해 분투해 왔다. 그 분투 중에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 2015년 8월 15일에 일어났다. 북한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그 시점에 남한보다 표준시를 30분 늦추었다. 그 시도는 남한과 중국 사이에 처해 있는 그 공간을 시간과 함께 활용해 보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북한의 시계(watch)는 남한보다 30분 늦게 중국보다 30분 빠르게 돌아가고(pass) 있다. 여기서 시간의 주도권이나 주관 문제가 제기된다. 표면상 북한은 자기들의 시간을 차지한 셈이다. 시간은 멈추어 있지 않고 지나가고 있는데, 인간들이 과연 그 시간을 붙들어 차지할 수 있는가? 그 어떤 인간도 쉬지 않고 가고 있는 그 시간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고장 난 벽시계가 아닌 이상!

그러면, 시간 자체가 절대적인 주권을 지니고 스스로 지나가는 것일까? 이것은 시간의 정체성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시간의 정체성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시간의 존재 여부이다. 시간은 정말 있는 것일까?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고, 현재는 지나가는 중인 찰나이고, 미래는 지나오지 않은 것이니…….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 회피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인간 가까이에 있다. 세월이 원망스러워도 멀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시간은 오묘한 점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항상 뜨거운 감자인 셈이다. 이 지나가고 있는 시간을 보면서 그 어딘가에 묻고 싶다. 시간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연구하고 질문하는 심정으로 몇 가지 제시한다. 이 제시는 결론이 아니며 시간에 가까이 가려고 할 때 마치 먼저 놓는 도로와 같은 역할로 삼고 싶은 것들이다.

첫째, 시간의 주관 문제이다. 이 주관(主管)은 주인과 같은 의미이다. 시간에 진정한 주인이 있는가? 이 질문이 인간에게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진정으로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의 주인이 되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와 같은 곳에 담겨 있지 않은가? 시간을 만든 주인이 있다면, 그분은 정말 대단한 기술자이다. 그 이유는 이렇게 정교하고도 오묘한 시간을 주도면밀하게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분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잘 알아 갈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 얼마나 행복해질까?

둘째, 시간의 목적 문제이다. 이 목적은 시간의 주관 문제에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시간을 만든 분이 왜 만들었을까? 심심해서 인간처럼 같이 놀기 위해 만들었을까?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많은 사람들이 우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을 두고 그 우연함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시간의 목적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그 모든 시기(점)와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시간의 형식 문제이다. 이 형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다. 이것은 시간의 시제이며 동시에 시기(時期)이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의미 속에 이미 과거나 미래 같은 형식이 내포되어 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고 흘러 어디로 가고 있을까?

<지난 123호 칼럼의 본문 중 ‘그 수에서 유다지파의 수만 22,000이고 나머지는 모두 12,000이다’를 ‘각 지파의 수는 각각 모두 12,000이다’로 정정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2,000년을 내다본 7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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