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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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12-23 09:3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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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즉 그 숫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능히 구할 이가 절대로 없으므로 그것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 내가 생각할 때에 한 숫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며 그 염소 두 눈 사이에는 현저한 뿔이 있더라 그것이 두 뿔 가진 숫양 곧 내가 본 바 강가에 섰던 양에게로 나아가되 분노한 힘으로 그것에게로 달려가더니 내가 본즉 그것이 숫양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서는 더욱 성내어 그 숫양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숫양을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더라 숫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다니엘 8:4~8, 개역성경)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 중에 아무런 인과 관계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우연(偶然)’이라는 단어가 있다. 또한, 뜻밖에 일이 잘되거나 바라던 일이 운이 좋게 이루어져 기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다행(多幸)’이라는 말도 있다. 기독인이라면 당연히 ‘우연’이나 ‘다행’이라는 이 두 표현의 사용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만사의 모든 일의 인과관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신학자, 목회자, 성도들마저도 강단에서나 일상에서 성경 역사나 예화를 들면서 우연과 다행이라는 단어를 자주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과 동일선상에 놓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호부터 성경 본문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니엘 선지자로 하여금 말씀하신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을 살펴본다면 우연이나 다행도 아닌, 그 누구도 하나님의 주권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역사적인 사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면서 고대 도시 곳곳에 세워지는 건축물 속에서 깃들고 있는 건축 사상의 내면적인 본질을 확인하기 전에 다소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역사적인 부분부터 차분히 살펴보면서 알아보려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상(浮上)에 그의 부친이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다

BC 340년경 알렉산드로스 3세가 16세가 되던 무렵에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는 전략적으로 요충지인 비잔티움(Byzantium)을 향하여 원정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마케도니아의 왕권을 임시로 맡기는 섭정(攝政, Regent)을 하게 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국가 지도자로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필립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에서 부재중임을 틈타 북쪽 트라키아계 부족인 마이디(Maedi)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는 신속하게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리고 점령 중심지에 도시를 세워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로폴리스(Alexandropolis)’라고 명명했다. 이는 과거에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자신의 통치 역량을 과시한 행동을 본받은 것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여러모로 부상(浮上)하는 아들의 모습을 본 필립포스 2세는 그의 아들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과 존경심도 있지만 이면에는 경쟁심, 질투심 내지는 과거 왕실에서 있었던 암투(暗鬪)에 의한 암살 사건이 다수 존재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부 사이 관계가 불편한 어머니 올림피아스(Olympias)가 있었다. 올림피아스가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고 싶은 욕망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기에 긴장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포스 2세 암살당하다

BC 337년, 알렉산드로스 3세와 그의 아버지와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현실로 발생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45세였던 필립포스 2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했던 정책 중 하나가 마케도니아의 정통적인 귀족 세력과 맺는 정략(政略)적인 결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임하는 장군 아탈로스(Attalus)의 조카 딸 마케도니아의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식 연회장에서 아탈로스 장군은 마케도니아 왕국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건배사를 했다. 아탈로스는 술에 취해 “신들께서 새로운 왕비로부터 이제 적법적인 순수 혈통의 후계자를 생산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도발적인 실언을 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알렉산드로스 3세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이웃 나라 에페이로스 출신이기 때문에 순수 마케도니아 혈통이 아닌 알렉산드로스 3세로서는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감정은 알렉산드로스 3세와 아탈로스 간에 술잔을 던지는 다툼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부자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자기를 해치려고 하다가 술에 취해 넘어진 아버지를 향해 모욕적인 조롱을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들은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함께 어머니의 나라 에페이로스로 피신했다.
얼마 후 필립포스 2세는 친구의 권유로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를 다시 마케도니아로 오도록 했다. 그리고 화해의 손짓으로 필립포스 2세의 딸과 올림피아스 남동생과 결혼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결혼식에서 필립포스 2세가 암살을 당하게 된다. 살인범은 파우사니아스라는 필립포스 2세의 경호병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이 당시 일반적인 사회상 중 하나였던 동성애 관계였고 필립포스 2세의 변심에 앙심을 품은 것이 살인의 원인이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살인범으로 올림피아스, 알렉산드로스 3세 등을 의심하는 이야기도 전해오곤 한다. 이 사건으로 알렉산드로스 3세는 부친 살인범 파우사니아스는 물론 아탈로스 등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등 왕위 계승에 문제가 될 친인척 등 내부 정적이 될 사람은 모두 제거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20세에 왕위에 등극, 세계 정복의 길을 떠나다

BC 336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사망 후 20대 어린 왕의 등장에 혼란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북방의 야만족 트라키아, 일리리아 부족과 그리스 반도 테베를 비롯한 도시국가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나라를 평정시켰다. 특히, 그리스 테베 도시국가에 대해 나라의 기능을 마비시켰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는 잔혹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동맹국 중 저항하지 않는 국가들은 어린 시절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배운 수사학으로 설득하여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설득력은 필립포스 2세 사망 후 코린토스 동맹에서 혼란한 동맹을 재결속하고 페르시아 침략에 명분을 얻는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22세 되던 해, 드디어 그리스의 적이자 당대 최강의 나라 페르시아 침략 야욕을 실행하게 된다. 마케도니아의 원정에서 있었던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그라니코스 전투(BC 334년)는 소아시아 진입 페르시아 연합군을 물리침으로 소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수스 전투(BC 333년)에서는 다레이오스 3세와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페르시아왕 다레이오스 3세는 도망치고 말았다.
그는 페르시아 해군력 무력화를 위해 진격(進擊)의 방향을 지중해 연안으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티루스(현재 레바논 남부 항구도시)의 공성전(BC 332년)을 7개월 만에 함락하는 힘겨운 전투도 있었다. 계속해서 마케도니아 군사들은 남쪽으로 진군했다.

이집트 백성, 알렉산드로스 3세를 해방자, 구원자로 환영하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당시 이집트를 관할하던 페르시아의 총독 마자케스가 저항 없이 항복하여 이집트인들의 마음속에 심장인 수도 멤피스(Memphis)에 무혈(無血)로 입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로부터 10년 동안 혹독한 지배하에 있었으며, 이집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신전 파괴와 무거운 세금을 거두고 있어 이집트 백성들 측면에서는 해방자, 구원자로 환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멤피스는 약 3,000년 동안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던 수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멤피스 창조와 장인·예술가의 수호신 ‘프타(Ptah)’를 숭배하는 성지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곳에 입성한 다음 프타 신전에서 왕을 세우는 이집트의 전통 방식에 따라 ‘파라오(Pharaoh)’로 즉위하게 됐다. 이는 그가 그리스 반도에서 온 정복자가 아니라 이집트의 정통 계승자임을 알리는 매우 정치적이면서도 문화, 종교적인 행위였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 3세는 저항하지 않는 국가에는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수용하는 친화적인 정치를 펼쳤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계속해서 황소를 숭배하는 ‘아피스(Apis)’에게도 제사를 지내고, 파괴된 이집트 신들을 모시는 신전을 재건했다. 이는 다신교를 믿는 그리스 문화를 이집트 문화와 융합하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서부, 매우 험난한 사막을 지나 리비아 국경 근처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시와(Siwa)’를 방문하게 된다. 왜 그는 오늘날 이집트 카이로에서 버스로 10시간 이상 소요되는 교통의 오지인, 지리적으로 험난한 사막을 횡단하면서 그곳에 갔을까? 그것은 시와에는 고대 세계에서 유명한 ‘아문 신전(Temple of the Oracle)’이 있었다. 아문(Amun)은 보이지 않는 만물 속에 깃들어져 숨겨져 있는 우주의 힘이자 신들의 왕으로 불릴 만큼 숭배받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곳을 찾아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의 신탁(神託)을 통해 그리스의 제우스와 이집트 아문 신의 아들로서의 신격화 과정과 합법적인 파라오임을 인정받으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아문 신전의 사제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아문 신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이러한 행위들이 그가 계속해서 세계 정복을 꿈꾸는 데 있어서 백성들에게 신적 예우(프로스키네시스, Proskynesis)를 요구하는 근거와 동시에 정치적·종교적인 정당성을 부여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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