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간담회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모두 4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1항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을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받은 자유는 유대인의 의식(儀式)적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 곧 성령과 충분히 교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2항에서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가 되신다’고 하면서 주신 양심의 자유로 말씀을 거스르는 교리나 계명을 맹종하거나 맹목하는 순종은 양심의 자유와 신앙적 이성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지금 기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인간이 받은 양심의 자유에 접근하기 전에, 지난 호 제19장에서 다루었던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잠시 짚어보고 오늘의 고백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제19장에 보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 내면에는 온전한 율법과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인간 내면에 ‘양심’으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지금 기자님이 요약한 것을 보면 자유는 하나님이 주셨고 우리가 받은 양심의 자유의 주관자도 하나님이 되신다는 내용 그 자체는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에 성경적 근거까지 달아놓고 성경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했으니 누가 보아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적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 전체를 수백 군데 인용하지만, 그것이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상당 부분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이 자신들이 할 말을 미리 확정해 놓고 그다음에 그곳에 어울리는 성경 구절을 찾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들이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은 인간의 자율적 의지나 인간의 합력 혹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을 강조하면서 끝낸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둬야 한다고 봅니다. 문제는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을 요구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무한한 은혜를 결국 뒤집어버리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이 고백서의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남은 고백서 내용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리라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죄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앞서 연구원이 지적한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도들의 신앙 행위를 너무 가볍게 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우리가 그 자유를 실천할 능력과 의무가 있으므로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죄에서 자유롭게 했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는 이런 태도는 ‘주신 자유 받은 자유’를 인간 삶의 ‘수단’으로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다는 진리를 빙자하여 자기 욕심으로 살겠다는 ‘사악한 본성’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방종할 것이 두려워서 자유가 육체의 기회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할 ‘책임성’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시 강조해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주권과 은혜를 흐려놓고 은혜를 율법의 제물로 만드는 모습은 정말로 무책임하게 보이며 비성경적인 처사입니다. 우리가 받은 자유의 보존과 관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면, 죄의 권세를 장악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연단하기 위해 사단에게 맡기시면 일시적으로 사단의 종노릇 합니다. 성도가 죄의 종노릇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자유’를 결코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자유’란 어떠한 정죄 상황이더라도 성령께서 반드시 보호하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의 대원칙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을 견고하게 양육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죄의 종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도들이 받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참 자유’가 어떤 죄의 유혹 속에서도 결코 훼손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확정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싶은 마음을 보존하시면서 그때마다 적절하게 살게 하시는데, 이 사실을 망각하고 이 상황을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우리가 자유를 실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유치한 단계이거나 뿌리 깊은 죄성의 심각함과 ‘절대 자유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도 잘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과오입니다.
S연구생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자유는 ‘절대적 자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잘 관리한다고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관리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2항에서 인간의 불신앙적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양심의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신 자유는 몇 가지 허물이 드러난다고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참 자유는 결코 인간의 의지로 관리되는 차원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이 주의해서 행동하면 맹종이나 맹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주의하지 않으면 맹종이나 맹목적으로 빠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제20항의 1항과 2항은 고백서의 목적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영광보다 인간 중심적인 방향으로 향하는 결함이 있다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부분을 좀 더 지적하려고 합니다. 앞에서도 ‘절대적 자유’를 말했는데, 제가 볼 때 그 말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신앙적 자유는 완전히 하나님의 종, 즉 성령에게 완전히 사로잡힌바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에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은 자기 하고 싶은 마음대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히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죄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도 우선 하나님께서 철저히 죄의 권세 사단을 사로잡고 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통제하시며 마지막 날 사망의 심판을 하기로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과정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로 더욱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넓고 길게, 높고 깊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 억압과 방탕의 권세인 사단도 사용하십니다. 성도들이 받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곤경에 처하지만, 그 역시도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므로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에 사로잡히게 하시면 부자유인 즉 노예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시키시면 하나님께 직접 사로잡힌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독교인의 양심의 자유에서 인간적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Y연구생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성도들이 잘못 관리하면 자유를 ‘파괴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가 육체의 기회, 방종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연단을 위해 사단에게 잠시 맡기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가 파괴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2항에서 말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가 되신다’는 내용과도 모순이 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말하고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자유가 파괴된다는 발상은 하나님의 은혜도 하나님의 전능성도 하나님의 언약도 모두 부정하는 말이 된다고 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고백은 인간의 능력으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자유를 ‘인간’이 무책임하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사단에게 파괴당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자유를 잘 관리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책무를 인간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자유’를 사단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분노하거나 후회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제20장의 제목에 보면 ‘양심의 자유’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앞에서 연구생도 지적했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심의 자유는 인간적인 차원의 양심의 자유와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양심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도덕적 양심과 하나님 중심의 종교적인(성경적인) 양심이 있습니다. 로마서 2장 5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된 양심은 인간 중심의 양심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9장 1장이나 로마서 13장 5절에서 말하는-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충만한 성도의 칭의와 관련된-양심은 하나님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진리가 함께 하는 ‘어진’ 마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양심은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윤리의 바탕을 말하지만, 성경적 종교의 양심은 절대자 하나님에 의해 상대자 피조물이 받은 무한한 은총에 의한 신앙(믿음)의 바탕을 말합니다.
성경적 양심의 자유를 인간의 도덕적 양심과 혼동하는 이유는 인간의 양심을 ‘자유롭게 마음먹는 대로 할 수 있는 본성’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 즉 하나님 아버지께 사로잡히는 것’ 외에는 ‘양심의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이 말은 일시적으로 사단의 종이 되어 처참하게 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는 결코 손상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를 사단의 권세인 육의 소욕에 맡기면 ‘양심의 자유’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단을 하나님께서 여전히 어떤 여지도 두지 않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를 잘 믿고 산다는 것은 죄 안 짓고 도덕 선생이 되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범죄 하든 하지 않든 죄성을 깊이 깨닫게 하여 여호와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나 세상이나 인간에게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적으로 생각해야 성도가 받은 ‘양심의 자유’를 통해 더욱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더 자랄 수 있습니다.
P연구생 원로께서 지금 설명하신 ‘양심의 자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시섭리로 이해해야 해결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영역으로 양심의 자유를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인간 스스로 자기 권리를 찾는 능력이나 인간의 자기 정체성의 핵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자유가 나에게 있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실천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본주의적이며 세상에 속한 양심에 호소해서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저버리게 되는 결과를 일으킨다고 봅니다.
객원기자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양심의 자유는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고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4항에 가면 세상 권력을 하나님이 세워주셨으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자유를 현상적인 교회 권력은 물론이고 세상 권력에도 복종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인간적인 교회 권력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본성 즉 양심이나 믿음, 예배와 성도생활 등의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는 범죄이며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는 악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교회법으로 문책당해 마땅하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성도의 자유를 부당하게 세속화하는 전형입니다. 교회의 평화와 질서는 교회의 제도나 법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에 의해 교회의 절대 표지인 성경 말씀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세상 권력이나 교회 권력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며 복종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권세를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일시적으로 맡겨 놓았습니다. 맡겨 놓았다는 말이 악의 세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권세는 결코 독립적이지 않으며 성도들의 양심의 자유를 세상 권력이 함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하는 양심의 자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 자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벨론 70년 포로기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그곳에서 집 짓고 살며 복종 당하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이 132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해서 전 세계로 유대인들을 흩어지게 해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실 목적으로 로마제국 아래에 있는 성도들에게 당분간 로마제국 아래에 복종 당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정하신 선한 뜻을 바라보면서 세상 권력 아래 살게 하시면 살게 됩니다. 그러나 꼭 명심해야 하는 것은 세상 권세 아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 속한 양심의 자유는 결코 훼손당하거나 억압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이러한 발상은 17세기 개혁파 교회가 다시 종교개혁 이전 구교(舊敎) 로마 가톨릭의 교황주의로 돌아가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므로 참담한 심경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자유는 세상의 권력과 제도와 법에 굴종하는 꼴이 됩니다. 이러한 발상은 교황주의에 대한 좀스러운 답습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세상법으로 성도들을 치리할 수 있단 말인가요. 지금 한국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교회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세속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신령한 교회와 성도들을 비성경적이고 불합리한 엉터리 법에 의한 제도를 가지고 다스리겠다는 정치 목사들의 행태가 우리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총회에서는 더 교묘한 제도를 만들어 교회와 성도를 더 치밀하게 억압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법의 유일한 창시자는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 유일한 법은 보혜사 성령께서 완성해 놓으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자유의 절대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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